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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꼭 낳아야 하나요?

인생이 도박이라면, 주사위는 한 번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

by 작가 전우형

아이는 꼭 낳아야 하나요?


요즘 20대와 결혼과 출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절반 이상은 비혼을 선택하거나, 결혼은 하더라도 아이는 낳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내 한 몸 챙기기도 힘든데 아이까지 어떻게 키워요. 저는 그럴 자신 없어요." 20대 중반이 된 어린 동생과의 대화에서는 이런 질문을 받기도 했다. "아이는 꼭 낳아야 해? 애 키우는 거 힘들지 않아?" "글쎄, 뭐 힘들다면 힘들긴 하지.. 부담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다음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무엇 하나로 딱 잘라 이야기해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꼭 낳아야 했을까?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이 좋았을까? 힘들었을까? 부모가 될 때 나는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답답했을까? 부담스러웠을까? 기뻤을까... 아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나 있었을까? 그저 살기 바빴던 것 같은데.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은 복잡 다변해서 한 마디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지 싶다. 부부에게 있어 아이는 커다란 숙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아이를 갖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도 막상 얼굴에서 빛이 나는듯한 다른 아이들을 보면 뭔가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후회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미련이 자꾸 남는다. 하지만 막상 내 아이를 갖자니 부담스럽다. 아이가 태어나면 일어날 삶의 변화가 두렵고, 한 아이의 인생을 보잘것없는 내가 고스란히 책임질 수 있을지 불안하고 부담스럽다. 육아는 체험판이 없다. 아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반품하거나 교환할 수도 없다. 때때로 자식을 버리는 부모도 있지만, 그런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상상할 부모는 없다. 부모가 되기를 망설이는 이유는 '부모'라는 이름에 담긴 깊은 책임감이 부담스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 아이의 아빠가 된 입장에서도 아이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속 시원한 조언을 건네기 어렵다.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결혼했으면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당연시되었지만, 요즘은 결혼생활의 여러 가지 옵션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결혼, 출산, 양육을 세트처럼 여기는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런 압박이나 의무감, 타인과의 비교 등을 의식해 아이를 갖는 것은 반대다. 부모의 삶을 살아보는 것은 분명 숭고하고 가치 있는 경험이지만, 결코 쉽고 편안한 여정은 아니다. 개인의 자유를 누리고 편안한 인생을 살고 싶다면, 아이를 가지는 것은 그러한 삶의 목표에 방해만 될 것이다. 부모에게 방해물로 여겨지는 아이는 행복하고 안정적으로 자라나기 어렵다.


양육비를 부담할 충분한 경제능력을 갖추었다고 해서 쉽게 결정할 문제도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물론 돈도 필요하지만, 돈이 아이를 키워주지는 않는다.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도, 부모의 일부도 아니다. 어떤 부모에게도 아이의 인생을 간섭하거나 결정할 권리는 없다. 그것은 부유한 부모라 해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자식에게 필요한 모든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해도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된, 엄연한 한 사람의 인격체라는 지위는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이 원칙을 벗어나 자녀가 가세를 불리기 위한 상품처럼 이용되거나, 아이의 인생이 부모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린다면, 그 자체로 아이의 삶은 비극이 되고 만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에 등장했던 아이들의 삶은 이런 문제들을 잘 표현해주었다.


'아이'가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부모의 인생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양육의 현실은 필연적으로 부모에게 희생적 노력을 요구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자신의 반평생을 투자하지만, 결국 아이는 부모의 품을 떠나 다른 세상으로 떠나야만 하는 존재다. 아이 한 명을 길러내기 위해 수 억을 투자해야 하지만, 그 금액은 대부분 돌려받지 못한다. 가장 자금 회수율이 낮은 투자항목을 꼽으라면 그것은 아마 '육아'일 것이다. 단순히 손익구조의 계산 하에서 아이를 가질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당연하게도 양육은 손해가 막심하고 절대 선택해서는 안될 사업이다.


아이를 길러내는 것이 부부에게 주어진 무조건적인 의무도 아니다.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부모는 자신의 건강, 인생, 노력, 자산 등 많은 것을 쏟아부어야 하는 것에 비해, 자녀는 독립된 인격체로 부모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그 투자의 성과도 불명확하다. 오랜 양육의 결과 남는 것은 부모 말도 듣지 않고 내 인생이니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고집투성이에 말썽꾸러기 아이일 수도 있다. 흙수저 부모를 만나 고생만 했다며 부모 마음에 송곳과 비수를 찔러대는, 차라리 남보다 못한 자식일 수도 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허무하고 공허해진 부모의 마음만 남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열심히 키워두면 아이는 부모 곁을 떠나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 바쁘다. 사회적 통념 상 성인이 된 자녀에게 '그동안 키워준 은혜가 있으니 이제 나이 들고 힘없는 부모를 보살펴달라.'는 요구도 하지 못하는 세상이다. 어찌 보면 연금보험만도 못한 것이 요즘 부모 자식 관계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이런 숱한 리스크와 단점을 딛고서도 아이를 낳고 길러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이를 가져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볼 때 해결될 수 있다.




'아이'는 부모에게 있어 어떤 의미일까?


아이의 존재는 부모에게 '겸손'의 가치를 가르쳐주는 스승과도 같다. 부부는 적절한 피임을 통해 가족계획을 세울 수는 있지만, 어떤 부부도 아이를 '선택'할 수는 없다. 아이는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태어나지만, 아이의 기질, 지능, 운동신경, 성격, 외모, 성장인자 등 그 어떤 것도 부모가 임의로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 없다. 아이는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 중에서 우연에 우연을 더해 자연적으로 선택'되어'진다. 부모가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없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최초의 존재가 바로 '아이'다.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을 때 부모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한다. 자신의 노력과 의지대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오만한 인간이, 최초로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다면, 그 순간은 바로 아이가 태어나던 그 순간일 것이다. 아이는 부모에게 '선물'같은 존재다. 아이를 대면할 때 비로소 부모는 생명의 경이로움과 '겸손'을 배운다.


아이는 그 자체로 부모를 강하게 할 뿐 아니라 삶의 '이유'가 된다. 열이 펄펄 나는 아이를 둘러업고 응급실로 내달렸던 엄마는 평소에 쌀포대 하나도 들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곤하게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미안함에 눈물 흘리는 부모는, 짜증내고 화냈던 하루를 반성하는 법을 배운다.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을 때야 비로소, 야생마같이 들이받는 것 밖에 모르던 사람도, 직장에서 참고 인내하는 법을 배운다. 아이의 존재는 부모가 혼자일 때는 결코 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을 가능케 하고, 버텨내지 못했던 상황을 버틸 힘을 주며, 그간의 삶에서 보고 듣지 못했던 것을 배울 수 있게 해 준다. 최초의 부모는 자신의 몸도 뒤집지 못했던 갓난아이와 같지만,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커다란 성장을 한다. 이 또한 아이가 부모에게 주는 '선물'과 같다.


부모가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의 부모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부모로서 경험하는 수많은 사건들은 자신이 과거에 경험했던 일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구성해볼 기회를 준다. 자녀의 입장에서 바라봤던 불합리하고 섭섭했던 순간들이 내가 부모가 되어본 후에야 비로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부모 자식 간에 있었던 해묵은 갈등이나 오래된 상처가 자연스럽게 치유되거나 수용 가능한 수준으로 완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양육의 과정이 부모에게도 이점이 있고,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아이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는 부족하다. 이런 이유들이 양육을 피하고 싶은 더 확실한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선택할 수 없는 고유한 한계는 그 자체로 더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다. 건강하지 못한 아이 한 명을 살려내려면 부모는 더 큰 희생적 노력을 기울여도 부족하다. 아픈 아이를 돌보고, 병원비를 대느라 부모의 인생 역시 송두리째 무너져내리기도 한다. 부모가 짊어져야 할 책임감과 의무감, 그리고 혼자였다면 충분히 누릴 수 있었을 경제적, 직업적, 시간적 여유를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 역시, 충분히 육아를 기피할 이유가 될 수 있다.




주사위는 한 번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양육을 선택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아이 없이 부모가 존재할 수 있을까? 단지 아이를 '양육'하는 입장에서 생각하는 한 부모는 언제까지나 기피 직종일 수밖에 없다. 최초의 육아 단계에서 부모는 생존능력이 전무한 갓난아이를 보살피고 생존과 성장에 필요한 지원을 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인다. 흔히 떠올리게 되는 양육에 대한 단상은, 밤새 울고 보채는 아이를 달래거나, 분유를 타 먹이고 젖병을 소독하고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쉴 새 없이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보며 아이에게 충분히 해줄 수 없어 자괴감을 느끼는 장면과 같이 양육 중 극히 일부분에 해당하는 상황만을 반영하기 쉽다. 이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진 예측은 주로 육아의 부정적인 면을 확대 해석하는데 소비된다.


가정은 '탁아소'가 아니다. 아이와 부모는 끊임없이 소통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단지 물질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아이를 영구적 피보호자로 여길 만큼 부모 자식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아이는 부모에게 삶의 이유가 되고 부부 사이의 강력한 연결고리가 되어준다. 육아의 어려움을 극복할 엔도르핀을 아이의 해맑은 웃음은 선사해준다. 잠깐의 어려운 시기가 지나면, 아이는 단지 보호받는 입장에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관계가 된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뿐 아니라, 힘든 시기에 의지가 되는 존재로 아이들의 위상이 변화된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이 일방적으로 부모에게 '희생'이라는 인식은 육아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고정관념일 뿐이다.


부모는 아이와 함께 성장한다. 한 사람의 책임 있는 어른으로 성장한 아이는, 부모에게도 하나의 성공적인 기억으로 남는다.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아이를 보며 부모는 뿌듯함을 느낀다. 결국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에 대한 선택은 스스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 이미 그 답은 스스로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인생은 사실 도박에 가깝다. 누구도 결과를 알고 인생을 살아가지 않으며,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는 인생은 없다. 결혼과 육아도 인생의 도박스러운 면모를 쏙 빼닮았다. 어떤 사람과 결혼하면 결혼생활이 행복할까? 어떤 마음으로 아이를 가지면 행복한 육아를 할 수 있을까? 아이가 있을 때 더 행복할까? 없을 때 더 행복할까?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고, 선택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본인의 몫이다. 어떻게 노력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노력을 통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삶에는 우연적인 요소가 너무나 많다. 하지만 누군가 '아이는 꼭 낳아야 하나요?'라고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인생이 도박과 같다면, 주사위는 한 번 던져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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