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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휴업 Aug 11. 2023

2023/08/11

오늘의 헛소리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습니다. 너무 유명한 책이라 어디부터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애당초 제 깜냥을 생각한다면 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책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책에 대해 느낀 점을 글로 짧게라도 남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글을 쓰기 전부터 걱정이 앞서네요. 어려운 책이었거든요. 짧아도 쉽지 않은 글쓰기가 될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든 한 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든 나오겠죠.


  카뮈는 평생을 부조리에 대해 탐구한 작가였습니다. 그렇기에 카뮈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말하는 부조리가 무엇인지 먼저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부조리는 세계와 우리가 그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우리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세계는 그냥 존재할 뿐이지요. 어떠한 합리성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 바로 우리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어떠한가요? 우리는 모든 것에서 이유와 의미를 찾고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계를 합리적인 곳으로 인식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나 섭리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계에서 권선징악을 찾고 돌멩이와 금덩어리를 구분 지으며 온갖 가치를 부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하지만 과연 그런 합리성이 세계에 존재할까요? 세계는 그냥 존재할 뿐인데? 결국 그 모든 것들은 우리 인간이 부여한 가치일 뿐입니다.


  그냥 존재하는 세계와 그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간.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세계가 보여주는 무질서와 비합리성에 알 수 없는 분노와 답답함만을 느끼게 될 뿐입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존재하는 세계와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 바로 그 간극이 알베르 카뮈가 주장하는 부조리입니다.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카뮈가 바라보는 비합리적인 세계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사망소식에도 동요를 보이지 않고 어머니의 시신이 안치된 방에서 관리인과 카페오레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기도 합니다. 장례를 치른 뒤에는 데이트를 즐기고 칼에 비친 햇살에 눈이 부시다는 이유로 사람을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 모든 행동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습니다. 즉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던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의 행동은 일반인으로 하여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됩니다.


  결국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은 고통이었죠. 교도관이 자신의 방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 하나에도 놀라며 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그들이 사형집행인인지 아닌지를 살피게 됩니다. 그는 죽음이 가까워지고 나서야 세계에 대한 집착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문득 세상의 무관심에 다정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냥 존재하는 자신이 있듯이 그냥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죠. 인간이 이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듯 자신은 그들에게 이해받기 힘든 존재였을 뿐입니다. 그렇게 그는 비합리적인 자신을 이해할 유일한 존재. 즉 비합리적인 세계를 인식하게 되고 그 세계에서 다정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뫼르소는 그것이 자신과 닮아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지금까지 행복했으며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카뮈의 철학은 얼핏 샤르트르로 대표되는 실존주의 철학과 많이 부분이 닮아 있어 보입니다. 특히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샤르트르는 인간을 본질 없이 그냥 실존하는 존재라고 보았고 카뮈는 세계를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존재하는 곳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조금 비약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 둘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인간과 세계 그저 존재하는 존재일 뿐이다'라고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카뮈는 살아생전 자신의 철학을 실존주의에 비교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 분명 실존주의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저는 단순히 세계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랐다고 이해를 했습니다.


  샤르트르는 본질이 없는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찾아 끊임없이 기투, 즉 스스로를 내던져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렇기에 기투는 극기이자 극복입니다. 본질이 없는 존재는 스스로 의미를 찾아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부조리를 극복의 존재로 본 것입니다.


  하지만 카뮈는 달랐습니다. 그는 부조리를 극복의 존재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되려 부조리에 반항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의미가 없는 세계를 향해 비웃으며 반항하라. 부조리를 즐기는 모습으로 반항하라. 누군가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면 그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반항은 그 고통을 즐기는 모습이 될 테니 즐기면서 끝없이 반항하라. 그는 부조리를 그 자체로 받아드리고 즐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그 둘의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카뮈는 기투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실존주의적 태도를 자기기만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습니다.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는 왜 그렇게까지 의미를 찾아야만 하는가. 세계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정히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 세계에 부여한 가치와 의미들에서 벗어나 그저 행복하게 현재를 살면 된다. 비합리적이고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휘둘리면서 의미를 찾겠다고 괜히 고통받지 말고 그냥 세계를 즐기라는 뜻이지요.


  샤르트르의 말처럼 우리는 그저 존재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카뮈의 주장대로 세계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의미가 있다고 믿는 이 세상은 그냥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부조리를 느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그냥 그 자리에 멈춰있어야만 할까요. 카뮈와 샤르트는 저에게 기투와 반항을 말하며 아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 둘 말고도 많은 철학자들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해답을 제시했지만 그들이 의도 한 바는 결국 같을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린 자들에게 왜 살아야 하는 지알려주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카뮈의 반항인들 샤르트르의 기투인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카뮈는 이방인을 통해 제게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그냥 즐겁게 살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비합리적인 세계를 그냥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죽음을 두려워하고 우울감을 느끼던 뫼르소가 세계의 무관심을 깨닫고 행복함을 느끼게 된 순간처럼 우리 또한 이 세계에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로 인해 느끼는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서든 우리의 삶을 긍정하고 스스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심지어 그 어느 순간이 죽음을 앞둔 극단적인 순간일지라도 말이죠.


  어찌어찌 글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게 잘 쓴 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정신차리고 다시 읽어보면 알겠죠. 그래도 글을 하나 마무리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창 밖으로는 해가 뜨고 있습니다. 밤을 샌 탓입니다. 저는 이제야 침대에 몸을 뉘입니다. 잠을 자야죠. 창밖으로는 아침 일찍 출근하는 이들의 자동차 소리가 들려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충실하게 보내는 이들이 모여 세상 움직이는 소리입니다. 침대막에 누워 창가에서 흔들리는 하얀 커튼을 바라봅니다. 밝아오는 햇살과 서늘한 새벽 공기 그리고 감겨오는 눈. 저녁에는 친구를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제가 가진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어야겠습니다. 그렇게 행복해지겠습니다. 자꾸만 눈이 감기네요. 그럼 여러분 모두 행복해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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