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사우나러가 될 수 있을까
신입사원 시절, 나의 첫 팀장님은 사우나를 좋아했다. 출장이 많은 팀이었는데 출장 중에 시간이 날 때면 언제나 '사우나 한 번 갈래?' 하고 물어보셨다. 나에게 목욕탕, 사우나란 단순히 목욕을 위한 곳이었다. 매일 샤워를 하는데 굳이 돈을 내고 사우나에 가서 목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냥 팀장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서 사우나를 따라가곤 했다.
그러던 내가 사우나의 효능(?)을 깨닫게 된 것은 <사도>라는 일본 드라마를 본 뒤부터다. 사우나의 '사'와 도리를 뜻하는 '도(道)'를 합쳐놓은 제목이다. 사우나의 도라는 뜻이라고 한다. 몇 명의 남자들이 사우나를 돌아다니며 땀을 흘린 경험을 나눈다. 도대체가 이런 걸로 드라마를 만들 생각을 하다니, 창의적 발상이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볼수록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이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둑어둑한 사우나실의 모습, 치익~ 하는 수증기 소리만이 가득하다. 주인공은 지그시 눈을 감고 땀을 흘린다. 한참을 땀을 흘리고 나서는 아주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근다. 우리는 누구나 이때의 상쾌함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5분 정도 가만히 앉아 휴식을 취한다. 아주 뜨겁게 달구었다가 다시 차갑게 식히고 온도의 텐션을 겪고 나서는 신체의 나른해짐을 느낀다. 이걸 반복할 뿐인데 주인공들은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나도 이들을 따라 한 두 달에 한 번씩은 사우나엘 가게 되었다. 이전에는 사우나실에 들어가기보다는 따듯한 물이 담긴 탕을 좋아했었다. 이제는 탕 보다는 사우나실 - 냉탕 - 휴식을 반복한다. 드라마에서 배운 대로 이걸 한 3~4세트 정도 즐긴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게 느껴진다. 머릿속 생각의 찌꺼기들이 땀과 함께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사도>에서는 이런 현상을 주인공들의 대사로 설명한다.
"사우나는 우리의 의식을 인식의 세계에서 감각의 세계로 데려다줍니다. 순수한 감각의 세계를 느낌으로써 희열을 느끼게 하죠. (드라마의 대사를 내 생각대로 재해석)"
우리에게는 때로 감각의 세계가 필요하다. 지나친 사고, 지나친 고민, 지나친 의식... 여기서 벗어나 순수한 감각의 세계로 이동하면 잠시 시름을 잊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의 뜨거움, 차가움을 느낀다. 여기의 공기가 얼마나 습한지 깨닫는다. 머리에서 빠져나와 귀로, 발끝으로 의식이 이동한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종종 이런 감각 중심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사우나를 찾는 것은 일터의 고단함 때문이다. <사도>에는 한 세일즈맨의 이야기가 나온다. 거래처에서는 요구 조건을 맞춰 오라고 윽박지른다. 회사 후배는 무능하다며 선배를 비웃는다. 아내는 아이의 시험기간이니 방해하지 말고 늦게 들어오라고 타박을 한다. 세일즈맨은 사우나를 찾아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흘린다.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위로한다.
나도 머리가 생각의 찌꺼기로 가득 찬 느낌이 들 때면 사우나를 찾는다. 뜨거운 탕 안에서 땀인지, 눈물인지, 콧물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흘린다. 오래 버티면 버틸수록 좋다. 더 많이 쏟아낼수록 더 깨끗하게 씻어내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주인공 일행은 좋은 사우나를 찾아 제대로 즐기는 사람을 <프로 사우나러>라고 부른다. 나는 초보 사우나러일 것 같다. 사우나를 주력 취미로 삼지는 못할 테니까. 사우나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는 무언가 우리를 위로할 시간, 장소, 취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