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라는 말에 스스로 영혼을 갈아넣었다

도전 과제를 통해 팀원 성장시키기

by 임희걸

업계 최초라는 전자책 교재


“교재 인쇄비가 너무 많이 드는데요. e-Book을 만들면 비용이 무지 절약되지 않을까요?”


교재를 담당하고 있는 후배의 말이 솔깃했다. 9년 전, 우리 회사에는 교재 전용 창고가 있을 정도로 종이 교재가 많았다. 다수의 교재를 인쇄하고, 보관하고, 또 전국 지점에 배송하는 비용이 상당했다. 우리는 합심하여 종이 교재를 전자책을 바꾸는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괜찮은 아이디어인데! 한 번 해봐.”


팀장에게 이렇게 흔쾌한 승낙을 듣는 일은 수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다. 팀장의 반응에 우리는 뛸 듯이 기뻤다. 게다가 당시의 팀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 너희들 덕분에 우리도 한 번 업계 최초가 되어 보자.”


업계 최초라, 내게는 참으로 가슴 설레는 말이었다. 우리 회사가 속한 금융보험산업은 산업의 발달 단계로 보면 성숙기에 해당한다. 성장률도 높지 않고, 장밋빛 전망이 쏟아지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다.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대개 아마존이나 애플의 스토리를 이야기한다. 한 해 두 해가 지나면 어느새 그들의 입에서 ‘혁신’이라는 단어가 사라진다. 혁신은 카카오, 네이버가 하는 거다.


그런데 이런 산업에서, 종이 교재를 개선하는 하찮은 프로젝트이긴 하지만 업계 최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획기적으로 들렸다. 물론 사내 교재를 전자책으로 만들었다고 우리를 우러러볼 회사는 없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늘 현상을 유지하기만 했던 업무 환경에서 최초가 될 수만 있다면!


당시 몇몇 회사가 문서를 PDF 형태로 변환하여 다운로드 받을 수 있게 하기는 했지만, e-Pub 파일로 완전한 전자책을 만드는 회사는 아직 없었다. e-Pub 형식은 PDF와 달리 기기에 따라 텍스트 배치가 유연하게 바뀐다. 자료 동영상이나 관련 웹페이지의 링크를 삽입할 수도 있다.


본래의 담당 업무를 다 끝내고 퇴근 무렵에야 전자책 프로젝트에 전념할 수 있었지만 아무리 야근해도 상관없었다. 진짜 재밌게 일하면 힘든 줄 모른다는 말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감했다.


아주 오래전도 아닌데도, 전자책이 생각보다 많이 활성화되지 않은 때였다. 전자책 제작을 위해 후배와 함께 인디자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배우러 갔는데, 교육생이 우리를 포함해 5명뿐이었다. 아직 초기 단계인 분야에 먼저 전문성을 쌓는다는 생각에 교육비를 내준 회사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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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은 카카오와 네이버의 몫인걸까


신문 기사에서 카카오, 네이버와 같은 첨단 기업의 스토리를 읽을 때면 꽤 부러운 것이 사실이다. 변화의 선두에 서 있다는 자부심, 우리가 길을 만든다는 기쁨에 찬 그들의 눈빛이 보이는 듯하다. 네이버, 카카오 출신이라면 디지털화를 꿈꾸는 회사 어디라도 스카우트를 하려 할 테니, 개인의 시장가치도 높아진다.


반대로 성숙 산업에 근무하면 늘 불안에 떨어야 한다. 미디어와 학자들은 첨단 기술이 산업 지형을 바꾸기 때문에 여기서 뒤떨어지는 회사는 도태된다는 말을 쉽게 던진다. 오래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 최신 유행의 대형 마트가 들어서는 느낌이랄까.


성숙기 산업 종사자로서 때로는 억울하기도 하다. 성장률이 높지 않아 저평가받고 있을 뿐, 높은 수익성을 가진 알짜 회사도 많기 때문이다. 대중은 최초와 최고만을 기억한다. 사람들은 최신 트렌드라고 하면 더 귀를 기울인다.


한 세미나에서 강연자로 나선 해외 컨설팅 회사의 임원은 첨단 기업이 주목받는 현상을 이렇게 논평했다.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본 혁신 기업은 미국에서도 실리콘 밸리 등에 일부가 있을 뿐입니다. 미국 동부 연안에는 미국을 대표하는 전통 산업 종사 기업이 많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꾸준히 실적을 개선하고 이익을 내고 있습니다. 애플, 구글, 아마존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그런 기업은 일부에요. 모두가 혁신적인 순 없죠.”


사실 성숙기 산업 중에서도 확고한 진입 장벽을 기반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는 ‘캐시 카우’가 많다. 이들은 애플이나 삼성과 같이 화려한 신상품 발표회를 여는 대신, 작은 혁신을 지속해서 쌓아 올리고 있다. 느리지만 꾸준한 혁신을 바탕으로 생존해 나가고 있다.


팀 단위에서도 꾸준한 혁신을 할 수 있다. 작은 혁신을 쌓아 올려 팀의 성과를 향상하고, 나아가 회사의 수익을 높일 수 있다. 아울러 팀원을 육성하고, 팀 전체의 역량을 향상할 수 있다. 단지 팀원들이 새로운 일에 시도할 수 있도록 배려하면 된다.


팀원에게는 이미 업무 혁신 아이디어가 많다. 맡은 일이나 잘하라는 분위기여서 아이디어를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때가 대부분이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지 않을까? 생각보다 큰 비용이 들지 않는 소소한 프로젝트도 많다. 전차책 프로젝트는 우리 2명의 외부 교육 비용과 관련 자료를 구매하는 비용 정도가 전부였다.



소규모 프로젝트로 팀원 육성하기


리더십 서적에 나오는 팀원 육성법에는 으레 ‘도전적 과제’를 부여하라고 한다. 이걸 불가능한 일을 시키는 것으로 착각하는 팀장이 있다.


“이건 박 차장이 했다가 실패한 건데, 이 과장 자네가 한 번 해봐.”


예산도 인력 지원도 이전과 똑같은데 실패한 일을 다시 성공시키라는 건, 당신의 영혼을 갈아 넣으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게다가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그만.’이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이런 일을 자신의 성장을 위한 과제로 생각할 팀원은 없다.


그래서 전자책 프로젝트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전히 망했다. 전자책을 잘 못 만들었다던가 사용하기 불편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만든 전자책은 꽤 쓸만했다. 파일럿 테스트에 참여했던 이용자들도 사용하기 편하다고 답했다.


문제는 우리의 트렌드 예측이 틀렸다는 점이었다. 종이책의 대체재는 전자책이 아니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동영상이 대체재였다. 전자책 프로젝트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 회사는 모바일 교육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사람들은 전차책 보다 모바일 동영상을 선호했다. 지금은 전자책 개발 인력의 몇 배에 해당하는 인원이 교육용 동영상을 만들고 있다. (출판 시장이 이전에 비해 어려운 것도 전자책 때문이 아닌, 유튜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완전히 실패했지만, 그 프로젝트는 정말 재밌었고, 거기에 참여했던 팀원 모두가 크게 성장했다고 느꼈다. 자발적으로 영혼을 갈아 넣은 결과, 우리는 개인의 성장이라는 과실을 얻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팀장이라면 팀원의 성장을 위해 도전 과제를 제안해보기를 바란다. 회사에서 주어지는 프로젝트는 진정한 의미의 도전 과제가 되기 어렵다. 회사는 비용을 투자하는 대신에 철저하게 성과를 관리하고, 성장보다는 성공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팀에서 자체적으로 제안하고 관리하는 소규모 프로젝트라면 성과 압박에서 자유로우면서 팀원의 실력 향상에 초점을 맞추어 운영할 수 있다.


‘지금의 업무량도 과다한데, 새로운 일을 더 벌이라니 팀원들이 반발할 텐데.’라고 걱정부터 떠오를 수도 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리더의 의도에 진정성이 있다면 팀원은 오히려 기뻐할 가능성이 크다. 순수하게 팀원의 성장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권하는 팀장의 말을 무조건 거부할 팀원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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