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내 글 속의 그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으면
"글쓰기는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선생님은 자꾸 스스로를 드러내기를 꺼려하시는 것 같네요."
초기 원고를 가지고 출판사 문을 두드리던 때의 일이다. 그나마 나를 좋게 보아주시고, 원고를 고쳐 오면 보아주시겠다고 한 출판사 대표님은 이렇게 평을 했다. (몇 번을 고쳐 쓰고 출간 계약을 하기까지는 그로부터도 한 참이 더 걸렸다.)
그때까지 내 글은 생각이나 주장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야기의 얼개를 갖추어진 글이 아니었기에 읽기 힘들었다. 아무리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생각과 주장의 나열로 된 문장은 오래 읽기 힘들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 깊이가 있는 글은 읽기 어려운 거라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다 편집자에게 따끔한 지적을 받은 것이다.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여러 차례 읽었던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의 한 대목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책은 내가 글쓰기 교과서로 삼아오던 터였다. 은유 작가는 연구공동체 수유너머 R에서 글쓰기 교실을 운영했다. 그의 수업에 참여하는 수강생들은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걸 어려워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쓰다 보면 뾰족하지 않은 두루뭉술한 글이 되어 버린다. 진짜 내 모습이 아닌 남들이 보아줬으면 하는 모습을 담게 된다. 재미도 없고 진정성이 떨어진다.
글쓰기는 곧 남들에게 보여지는 삶, 해석당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일이다. (은유 <글쓰기의 최선선> p. 60)
은유 작가와 출판사 대표님 두 분 모두가 같은 말을 했다. 그래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후의 내 글은 문체가 크게 달라졌다. 상황을 보여주는데 더 초점을 두었다. 일단 내가 겪은 특정한 상황을 가급적 상세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해석과 의미 전달을 얹는 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글이라는 게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냥 나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면 내가 남들의 눈에 어떻게 비치든 눈을 한 번 질끈 감으면 그뿐이다. 그런데 나는 직장 생활에 대해서 쓴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람의 직장 상사나 동료가 등장한다. H 팀장, K 과장... 등 알파펫으로 이름을 대신한다. 그런데 지인들이 브런치 글을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꼭 묻곤 한다.
"K 과장 때문에 후배들이 정말 괴로웠겠네요. 그런데 그 K 가 누구예요? 지금 우리 회사에 아직 있죠?"
최근에 책을 낸 이후로는 그런 질문이 더 잦아졌다. 책을 내고 나면 우선 지인들을 대상으로 출간 소식을 알린다. 책 집필은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해 보았을 버킷 리스트이다. 다들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는데, 책에 등장하는 인물을 실제 모델을 묻는 질문이 점점 늘고 있어 당혹스럽다. 어떤 지인은 내가 전달하려던 의미에는 관심이 없었다. 예화만을 읽고 모델이 누군인지 찾으려 애썼다. 어떤 동료는 왜 자기는 책에 등장하지 않느냐며 섭섭해했다.
"소설 쓰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일부 순간만을 상세히 묘사하면 그게 한 편의 소설이 된다."
나는 문학을 전공했다. 어느 전공 수업에서 교수님이 들려준 소설 쓰기의 원리가 뇌리에 깊이 박혔다. 그만큼 공감이 되었던 거다. 드라마건 소설이건 우리가 몰입하고 공감하는 건, 우리 인생에 있음 직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다만 인생이 지루하고 따분한 데 반해, 드라마나 소설이 짜릿한 것은 단맛과 짠 맛이 느껴지는 순간만을 따로 모았기 때문이다.
내 책을 보면서 "과연 이렇게 좋은 (때로는 이렇게 나쁜) 상사가 진짜로 있어?"라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 분명 존재한다. 다만 책에는 일상적인 회사생활 95 퍼센트보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는 5 퍼센트의 시간을 기록했을 뿐이다. 나는 책을 통해 직장생활에 희망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매일매일 즐겁게 출근할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열정과 보람과 성장의 5 퍼센트의 시간이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나는 오늘도 그 5 퍼센트를 기대하며 출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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