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을 게을리하면 빌런이 되는 원리
직장생활에는 홀수로 슬럼프가 온다고 말한다. 왜 3년 차나 5년 차에 일이 하기 싫어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 성장의 정체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 신입사원 때는 어떤 일이든 배우기 바쁘다. 그러다 보니 성장에 도취되어 금방 고통을 잊게 된다. 그러다 3년 차 즈음이 되면 슬슬 일이 만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9급 때 바둑이 가장 만만하게 느껴지고, 운전 1년 차에 주로 사고가 난다.
그러다 3년 차, 5년 차가 이직에 나서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등장한다. 바로 무능력한 상사와 마주칠 때다. 어느 회사나 오피스 빌런이라 불리는 무능력한 상사가 있다. 오피스 빌런은 사무실 내의 악당을 뜻하는 말로, 조직 내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비꼰 신조어다.
빌런의 특징은 불평불만이 잦고, 될 수 있으면 일을 적게 맡으려 애쓴다는 점이다. 일로 성과를 보여주기보다는 사내 정치에 심혈을 기울인다. 이들이 제일 얄미울 때는 상사에게는 잘 보이려 하면서 동료에게 거만하게 굴거나, 후배에게 일의 책임을 떠넘기려 할 때다.
내가 경험한 나쁜 상사들은 주로 <불안>때문에 만들어졌다. 나이가 들 수록 현재의 자리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불안으로 위축된다. 나름 거기에 대응할 전략을 세우는데 그 방법이 사내 정치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 떠넘기기 같은 야비한 방법이다.
T팀장은 본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전업주부인 아내가 있고 두 아이의 사교육비로 힘들어하며, 주택담보 대출을 갚느라 돈이 늘 모자란다고 말하곤 했다. 회사에서 잘리면 어떻게 하나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러다 보니 인사 평가에 민감하고 윗사람의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드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
업무에서 정과가 나지 않으면 그 책임을 돌릴 아랫사람을 찾았다. 임원과 술자리를 갖고 아랫사람들 탓에 부서 업무가 틀어졌다고 책임을 떠넘기기 일쑤였다.
"상무님 이번 일이 잘 못된 건 제 책임이 아닙니다. 팀원들 관리한다고 나름 애썼는데 말이죠. 그 P대리가 워낙 오만해서 제 지시를 제대로 따라야지 말이죠. 그렇다고 다른 친구들 눈치도 있고 P대리 그 녀석도 불쌍하니 함부로 내 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는 있습니다. 제가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겠습니다. 그러니 이 일은 그 점을 좀 감안해 주세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팀원들은 억울하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런데도 사내에서는 그의 악행을 직접 임원에게 보고하거나 공식 절차를 통해 신고하기 어려웠다. 회사에서는 종종 악당일수록 우수인력으로 평가받는다. 동료들은 모두가 그가 악당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이상하게 윗사람들만 이를 모른다. 악당일수록 자기 인사권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천사가 되기 위해 애쓰기 때문이다.
T팀장의 나쁜 행실이 드러난 것은 퇴사자 덕분이었다. 팀원들이 연달아 사직서를 내고 T팀장과의 불화를 퇴직 사유로 든 것이었다. 결국 T팀장은 보직에서 해임되고 한직으로 발령이 났다.
T팀장과 오래 일한 선후배들은 청년 시절과 비교해 그가 많이 달라졌다고 이야기했다. 어떤 이는 불안에 영혼이 잠식당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가장 정확한 분석이라고 믿는다. 빌런도 집에 돌아가면 보통의 아빠, 엄마다. 좋은 아파트를 얻어야 하고, 차를 바꿔야 하고, 아이들의 사교육을 늘려야만 할 것 같다. 이 모두가 내가 진짜 바라는 삶이어서가 아니라 남들 모두가 그렇게 사는데 나만 뒤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스탠더드라고 일컬어지는 라이프 스타일을 따라가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밥줄이 끊기는 순간, 스탠더드에서 낙오하고 비참한 삶이 된다. 이런 일련의 생각 속에 불안은 점점 커지고 어떻게든 조직에서 버텨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불안에 대처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성장을 통해 불안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방법과 불안을 잊기 위해 단기적인 결과에 매달리는 것이다.
성장을 택하면 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성장을 쫓지만,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도전에 자신감을 잃는다. 중년이 되면 인간이 계속 성장한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않게 된다. 실력이 늘어나고 지금보다 미래가 더 좋아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다 보니, 상대를 밀어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긴다. 함께 성장하기보다는 누군가를 제쳐야만 덜 불안하다고 느낀다.
젊은 시절 늘 손에 책을 들고 있었지만 이제는 한 해가 다 가도록 책 한 권을 들지 않는 선배를 많이 보았다. 회사가 제공해 준 임원실의 비싼 책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골프용품 장식장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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