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히가 되기까지

by 이방글

어릴 때 기억은 선명하진 않지만 충격적인 사건이나 감정적 동요가 컸던 일들은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는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상적인 날들은 기억 속에서 흐릿하거나 지워지고 인상 깊은 일들만 떠오르는 걸 보면 맞는 말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유독 하고 싶은 게 없던 아이였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 어린 나를 제외하고는 일하느라 공부하느라 나에게 관심이 집중되진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무던했던 성향과 뭐든 혼자 알아서 하는 게 당연했던 환경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지금도 엄마는 내게 '사춘기가 언제였는지도 모를 만큼 착했다.'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반항이 시작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나는 누구인가?'를 곱씹는 사춘기는 아니었지만 나의 존재와 가족, 친구들을 보며 깊은 생각에 빠지곤 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탈을 하지 않았을 뿐 마음속에서는 소용돌이가 거세게 쳤다가 잠잠해졌다가를 반복하곤 했다. 그러한 일상 속에서 갑작스러운 아빠의 부재가 지금의 나를 나로 변화시킨 기폭제였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너는 뭐가 되고 싶어?"라는 질문을 인사치레처럼 받던 그때, 나는 속으로 항상 이렇게 대답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지금도 생각 중이에요.


맞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지금도 생각 중이다. 그 '무엇'을 여전히 아직도 찾고 있는 중이지만 '무엇'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곳에서 한 걸음, 내가 좋아하는 공간 한 걸음,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 한 걸음. 이렇게 다가가다 보면 '무엇'에 다다르지 않을까.


대학교 4학년 시절, 졸업하면 어디로 취업하고 싶냐는 질문을 하루에도 수십 번 들었다. 그때마다 난 아직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대답을 하면 사람들은 당황한 낯빛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럴 만도 한 게 다들 취업을 향해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나만 덩그러니 그 시간 속에 멈춰있었다. 스스로 나를 비춰보면 그때까지도 난 여전히 사춘기였다고 말한다. '나'를 탐구하고 존재 여부에 대해 궁금해하고 생각하고. 늘 정해주는 길을 걸어가던 내가 나 스스로에게 물음표를 던지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

[내가 관심 있고 좋아하는 것들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두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고 답을 하는 걸 반복했다. 혹시나 내가 생각해 내지 못했던 또 다른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을까 봐 수없이 묻고 또 물었다. 결국 나는 한 단어로 표현해 내지 못했다. 질문의 종착지를 찾을 수 없었고 어딘가, 무언가 일 거라고 두루뭉술하게 결론을 냈다. 대신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해 보기로 했다.

- 커피, 사진, 책, 꽃, 사람, 따뜻함, 자연, 하늘, 바다, 색, 손으로 만드는 일, 글쓰기, 특별함…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선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한 건 직접 해보고 모르면 배우고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가지자고 결론이 났다. 그때부터였다. 나만의 공간을 가지기 위해 긴 시간을 달려왔다는걸.


대학원을 진학하기 위해 들어갔던 랩실에서 도망치듯 나와 커피 프랜차이즈 회사를 들어갔고, 아주 운이 좋게도 식품회사의 핵심 부서인 상품개발팀으로 발령이 났다. 때마침 전공자 우선이었던 자리에 TO가 났었고, 전국에 몇 없는 전공 학과 출신으로 운 좋게 잡혀갔다고 난 늘 말한다.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이해될 때까지 집요함을 보여줬고 '하루에 질문 1개만 하기'라는 말을 매일 수십 번을 들으면서도 사수가 두 손 두 발 들게끔 만들었다.(이ㅇㅇ선배님, 조ㅇㅇ선배님 그 외 협력사 담당자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 덕분에 기본기가 탄탄해졌고 누구보다 빠르게 상품 업무에 대해 파고들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잔잔히를 만든 베이스라 생각한다.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본사부터 영업 현장까지 경험할 수 있었고, 좋은 선후배들을 만나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한 부서에서만 근무했다면 편향된 시선으로 아직도 구상만 하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궁금하면 알아야 하는 성격에 직접 그 속으로 뛰어들어 배우고 익히고 실행을 해보는 시간들이 나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줬고, 그저 멀게만 느껴졌던 다음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잔잔히]

: 바람이나 물결 따위가 가라앉아 잠잠하게, 분위기가 고요하고 평화롭게, 태도 따위가 차분하고 평온하게


첫 번째 후보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하치의 마지막 연인을 읽고 주인공에게 안부의 인사를 전하는 '안녕 하치'였다. 오래도록 유지했던 생각이 독일어 'Sehnsucht' 동경이라는 뜻의 단어를 알게 되면서 중간에 후보가 바뀌었다.(발음이 '젠주흐트' 뜻은 '먼 곳에 대한 그리움', '간절한 바람',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다.) 내가 사랑하는 제주와 발음이 비슷해서 이걸로 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오픈하기 직전, '잔잔히'가 되었다. 제주의 구옥이라는 공간과 어울리는 음률이었고 나와도 결이 맞는 말이었다. 내가 바라던 분위기를 나타내는 말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결국 오래도록 간직했던 '안녕 하치'와 '젠주흐트'는 기억 속에 담아두고 '잔잔히'로 태어났다.


내가 좋아하는 곳에서 나만의 분위기로, 오로지 나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채워나가려 한다. 이제 또 다른 무언가의 다음 역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잔잔히, 그리고 지금 제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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