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의 나는 자주 답답했고 속이 울렁였고 가슴이 무거웠다. 책이나 영화를 보면 주인공과 내가 분리가 안 되어 한동안 마음이 힘들었다. 가장 좋아하던 만화 캐릭터가 죽었을 땐 너무 슬퍼서 하루 종일 밥도 먹지 못했다. 그러다가도 별 것 아닌 일에 갑자기 행복해져서 몸이 하늘로 두둥실 떠오를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럴 때면 옥상에서 뛰어내려도 어쩐지 추락하지 않고 하늘 위를 헤엄치듯 거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사춘기의 신열이었을 뿐이지만 당시엔 그것이 내가 가진 예술적 씨앗인 줄 알았다. 자꾸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끈하고 묵직한 것이 일렁였다. 그것을 품고 있기 버거웠지만 그것을 가진 내가 자랑스러웠다. 오징어 내장을 꺼내듯 입 안에 손을 깊숙이 밀어 넣어 그것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숨통이 틔이고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그 울렁임이 더 심해져 내 안에서 더 거친 파도가 몰아치기를, 그래서 그 파도가 나를 좀 더 예술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주길 바라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가 예술가의 피를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그 근거를 아빠가 그림쟁이라는 데서 찾았다. 친가 쪽엔 미술 하는 사람, 음악 하는 사람, 영화하는 사람, 글 쓰는 사람 등 다양한 예술쟁이들이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예술로 돈을 벌지 못했다. 나는 그들을 인간적으로 경멸했다. 그들은 오만했고 무례했고 배려심이 없었고 자기중심적이었다.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아빠는 재능 있는 화가였지만 은퇴하는 순간까지 전업 작가로 살지는 못했다. 아빠는 사십 대가 끝나갈 무렵 즈음 생업과 자신의 예술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했다고 했다.
나는 아빠를 인간적으로 존경할 수 없었고 닮고 싶지도 않았다. 아빠의 원가족과 친척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내가 과연 예술적 재능이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할 때면 늘 내가 원하는 답변에 대한 근거를 내 능력이 아닌 아빠의 유전자에서 찾았다. 내가 가진 것은, 고작 17살 먹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미천했기 때문이다. 감탄하는 능력, 부러워하는 능력, 지레 좌절하는 능력이 내가 가진 가장 주된 능력이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어야 했기에 그런 나에게는 ‘아직 미처 발현되지 않은 예술가의 유전자’가 있을 거라고 믿어야 했고 그 증거를 찾는 일에 하루의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 시절 내 주된 일과 중 하나는 자아를 의탁할 만한 여성 예술가들을 찾는 일이었다. 버지니아 울프, 제인 오스틴, 프리다 칼로, 나혜석, 전혜린, 루 살로메, 알마 말러, 조르주 상드.... 대체로 내가 사랑한 여성 예술가들은 당대 천재들의 영혼을 지배하는 뮤즈였거나, 시대가 요구한 여성의 굴레를 거부하고 삶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다가 아스라이 스러진 이들이었다. 그들의 삶에 대한 나의 이해도는 아주 살짝 넓었고 매우 얕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정보 만으로도 그들을 사랑하게 되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사실 그렇게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저 조금 멋져 보이는 여자들을 찾고 싶었던 것이므로.
책 한 권, 영화 한 편, 그림 한 점으로 그녀들의 삶을 다 들여다 보기라도 한 양 가슴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그 슬픔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실컷 울고 난 후 눈이 퉁퉁 부은 내 모습을 거울로 들여다보거나, 그들로 인해 내가 엉엉 울었다는 사실을 일기에 쓰는 일이었다. 그들과 함께 공명하는 내 모습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울고 난 다음 날의 나는 어쩐지 그들처럼 우수에 젖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차마 말로 다 풀어내지 못한 많은 사연들을 담고 있는 얼굴, 웃고 있지만 슬픈 얼굴을 하고서 학교에 갔다. 교복을 입고 늘 같은 길을 걸어 등하교를 하면서도 상상 속의 나는 우울과 싸우며 글을 쓰는 버지니아 울프였고, 고통에 울부짖으며 그림을 그리는 프리다 칼로였다. 고통스러운 삶은 한 인간을 예술가로 승화시키는 데 있어 필수적 요소인가에 대해 고민하다가, 내 삶에는 나를 예술가로 만들만한 치명적인 고통이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기도 안심하기도 했다. 그들의 빛나는 재능과 불꽃같은 삶이 나와는 아무런 교차점이 없다는 사실에 풀이 죽었다. 재능도 없을뿐더러 그들만큼의 치열함과 끈기조차 갖질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론 스스로를 조금 미워하기도 했다.
학급의 내 책상 위에는 “제대로 꺼내지 못할 바엔 차라리 갖지 못한 게 나아.”라는 낙서가 있었다. 당연히 내가 쓴 거였다. 일기장에 혼자 써도 되는 내용이었지만 학급 책상에다 썼다. 자리가 바뀌어도 일부러 지우지 않았다. 나는 내가 사랑했던 그녀들과 매우 달랐지만 그래도 우리 반 아이들 중에선 내가 그녀들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겼다. 그것을 티 내지 못해 안달이 났었다. 관객 없는 극장에서 나 홀로 비극을 연기했다. 머리털 끝자락 하나조차 닿지 못할, 나와는 몇 광년 떨어진 곳의 예술가들의 고통과 고뇌를 내 얄팍한 고민들과 저울질하면서, 마치 내가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살리엘리라도 되는 양 홀로 동경과 좌절을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