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Mar 08. 2021
좋은 사람에게만 보이는 좋은 마음
내 마음이 네 마음 같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씁니다.
기록자의 삶에서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아이러니하면서도 당연한 것은 어제와 같은 오늘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당연한 날들이기도 했겠지만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자신에게만큼은 거짓 없이 말해야 했고 거짓 없이 기록되었어야 했다. 그런 시간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까지 쌓인 기록물과 메모들은 내가 이 일을 하는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길잡이이자 글의 소스가 되어주었다. 베프인 내 친구는 도대체가 불안해서 어떻게 그렇게 무언가를 써대면 가족 중에 누구라도 읽을까 봐 불안하지 않냐고 웃으면서 물어본 적도 있지만 누군가 읽고 안 읽는지에 관해 신경이 쓰였더라면 어쩌면 처음부터 쓸려고 시작조차 안 했을 이 습관들은 사실 어떤 낯선 이의 연습에 연습으로 이어진 훈련 같은 것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만약 슬펐던 어떤 하루를 거짓으로 기록했다면 나는 두 번 다시 그 부분을 펴서 읽을 엄두조차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기록의 힘이라기 보단 어쩌면 나 스스로 나에게 한 작지만 큰 약속이기도 했으니까.. 어떠한 경우에도 거짓말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지 않는 것처럼 거짓의 글은 언제나 쓸모없는 쓰레기 같아 그저 한 줄만 읽어도 바로 쓰레기통으로 그 내용들이 사라지기에 딱 적합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의 스타일은요..
글 쓰는 스타일 역시 마찬가지이다. 길게 오래 잡고 오랫동안 글을 쓰시는 분의 스타일도 있을 것이고 짧게 바로 집중해서 한 번에 쓰는 스타일로 글을 쓰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오랜 경험상 나는 후자에 속한다. 길게 붙잡고 늘어진다고 해서 글이 잘 써지는 편이 아니라 기회가 왔을 때 쓰기 시작하면 술술 넘어가는 편이어서 마음의 부팅이 걸릴 때까지 자신에게 시비를 잘 안거는 스타일의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을 담아 후회 없이 일사천리로 글을 쓰는 편이다. 물론 펜을 잡거나 키보드에 손을 올리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글마다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늘 내 마음속 한편에 글을 써야 하는 공장 속 부품 같은 단어들이 늘 내 뇌리 속에서 또 다른 언어로 춤을 추어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런 자투리 같은 생각들을 모아 또다시 글을 쓰고 글을 만든다.
종이는 기억력이 좋습니다.
얼마 전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이 열광해하던 물건의 미니멀리즘(minimalism)에 나 또한 홀릭하게 되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것들을 천천히 하나씩 버리기 시작했다. 효율적인 공간 활용을 위해서도 마찬가지 이겠지만 물건을 사는 것보다 안 쓰는 물건들을 먼저 정리하는데 집중해서 버리기 시작해 보니 생각보다 능률적이었고 삶의 질 또한 좋아진걸 스스로 느끼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료조사차 모아놓은 복사본 종이들은 생각보다 버리기 쉽지 않았다.
그런 종이들은 대부분 내가 읽은 책들 중에 발췌해서 기억하고 싶은 자료들이었지만 복사본이라고 해서 쉽게 버려지고 내팽개쳐지게 되지는 않았다. 정리하기 전에는 그래도 어렵지 않게 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무용책의 경우에는 거의 아르코 예술 기록관 같은 곳에서 책을 빌려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내 책이 아니어서 줄을 치거나 형광펜으로 그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아 중요한 부분은 거의 복사를 해서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카피본들의 글들조차도 저마다 다 살아남은 문장들로 생존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투명 박스 안에 오려지고 붙여져 쌓여있을지언정 저마다의 사연과 서바이벌로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언제라도 빛을 볼 그날을 기다리며 지내고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복사본의 글들과는 다르게 날짜대로 매일처럼 기록하는 연습장의 경우엔 날마다의 다른 상황들과 사연으로 저마다의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편이었다. 어떻게 보면 보기에 따라서 너무나 유치하거나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라고 폄하할 수 도 있겠지만 그 유치하고 별 볼 일 없는 기록이 때론 큰 글의 줄기가 되어주고 단서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습관처럼 하는 기록이 무서운 것이고 그 기록이 주는 선물 또한 의외의 곳에서 의외의 기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매일같이 하는 기록은 아주 가끔 생각나서 하는 기록과는 다른 면이 있다.
무엇보다 기록이 주는 최고의 정점이 주는 순간은 종이만이 내게 줄 수 있는 '진심 어린 위로'라고 생각한다. 슬펐을 때 가장 친한 그 누군가에도 조차 내 속내를 보여주기 조차 힘든 그런 순간에 맞이하는 그때, 하얀색 종이 위에 거짓 없이 진실되게 그 마음을 오롯이 드러내다 보면 그날만큼은 한없이 초라하고 하찮한 자신이 미워서 견딜 수 없을지라도 훗날 세월이 흘러 똑같은 장면을 다시 회상하며 그 글 속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되찾으며 그 글을 읽어볼 때의 내 모습은 기록한 날의 모습과 절대 오버랩되지는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