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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의 민낯

튜튜 보다 반바지를 더 좋아하긴 하지만....

by 홍지승

희한하게도 난 어렸을 때부터 예쁜 연습복에 대한 동경이 없었다. 두세 개 남짓한 연습복을 줄기차게 돌려 입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미감, 거창하게 하려는 철학의 문제였다. 당시 무용 학원에는 흑백의 발레리나 사진이 하나 걸려 있었는데 낡은 레오타드에 구멍 난 스타킹, 올이 한참이나 풀린 다리 워머를 하고 땀 흘리고 있는 무용수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다.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과 튀어나온 쇄골은 감쌀 수 없도록 헐렁해진 연습복 그리고 이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무엇엔가 집중한 무용수의 자태는 경건했다. 진흙에서 피어난 연꽃이랄까. 늘어날 대로 늘어나 후들거리는 스타킹을 무심하게 발목까지 걷어올린 아래로 드러난 팽팽한 아킬레스건! 나 역시 '낡은 무용복에도 불구하고 '춤을 잘 추고 싶었다.

정옥희. 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 엘도라도. 32~33p



환상과 현실.


돌이켜보면 나도 그랬다. 연습실 안에서 느낀 공기와 기운 그리고 낡은 레오타드와 타이즈에서 나는 쉰내와 땀 냄새가 그리 싫지 않았다. 그저 그 안에서 숨소리만 나도 그 안의 공기를 가로질러 나가는 동작에 환호했고 그 안에서 동기나 선, 후배와 나누던 수다가 그리도 재미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촌스럽고 이상해도 그때의 그 시간들은 세월이 이렇게 오래 흐른 뒤에도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이 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 다들 무대에 열광하고 무용수들을 제대로 사랑하는 건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이라고 말하기도 하던데.... 나는 그저 무대 아래, 연습실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를 훨씬 더 사랑한다는 것을 무용수들의 사진과 뒤태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취향의 차이일수도 있겠지만 연습실이 주는 특별함을 모르진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춤과 내가 좋아하는 춤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늘 했던 모양이었다.




드디어 D-day.


아킬레스건이 끊어지고 재활 때문에 수영을 몇 년간 다녀야 했고, 집에 발레바와 거울을 붙여 놓았어도 다시 바를 잡고 거울을 보는 일이 쉽지 않아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렇게 연재하는 글도 있는데 스튜디오에 가서 다시 발레를 해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서 발레 학원 쿠폰을 끊어서 가서 며칠 전에 연습을 하러 갔었다.

요즘도 여전히 수영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래도 늘 마음 한편에는 발레학원에도 가야지 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한 2주 전쯤 학원에 체험수업 예약을 하고 가기 전날까지 소풍 가는 학생의 마음처럼 몸도 풀고 거울도 보고 즐거워했던 나를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센터에서 춤을 출 수 있을까? 싶은 걱정이 앞선 것도 사실이다. 기본운동이야 적당히 알아서 푼다고 해도 센터에서의 춤은 적나라하게 풀어야 하는 수학문제 같다는 표현처럼 센터에 나가서 춤을 추는 건 내게 직면한 또 다른 어려운 문제이기도 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탓도 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던 건 감이 떨어져서 턴조차 못 돌까 봐 그리고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이후에 제대로 된 발레 연습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도 쿠폰 수업을 예약한 그날, 컨디션을 위해 일부러 차도 놓고 내가 좋아하는 버스를 타고 창 밖의 풍경을 보면서 학원에 가는 그 길이 더없이 좋았다.

내 기분도 봄날 그 자체 같아서 더없이 감사하고 행복했다. 그리고 그날, 국립발레단 공연 때 보았던 발레리노 선생님께 수업을 받는데 그는 내가 무대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근사하고 나이스하게 우리에게 시범을 보여주고 이렇게 춤을 추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만큼 나에게 연습실에서의 춤은 무대에서 추는 춤만큼 중요했다. 그날 그 즐거운 수업 덕분에 집중해서 설명을 듣고 춤을 출 수 있어서 기쁘고 좋았다. 체험수업의 본질은 결국 내가 다시 학원으로 가서 발레를 배울 수 있나? 없나? 의 문제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날 수업을 통해 다시 돌아가도 될 만큼의 컨디션과 명분이 얻을 수 있어서 좋았고 발레리노 선생님 가르침 덕분에 쫀쫀해진 허벅지의 통증과 늘어난 팔의 통증이 나를 그렇게 기분 좋게 할 수 없었다.

물론 너무나 오랜만에 수업에 참여한 덕분에 제대로 잘하지 못 한 동작들은 내게 숙제처럼 남아있지만 그거야 뭐 앞으로 천천히 집에서 예습과 복습을 통해 늘리면 되는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 말대로 춤은 느낌으로 조금 더 길게 추는 것이라는 그 표현이 좋았다. 무대에서 그의 춤을 보고 우연찮게 공연 말미에 그의 퇴단을 알리며 꽃다발을 받는 발레리노를 보면서 그가 그인 줄 몰랐으나 무대에서보다 연습실에서 추는 그의 춤은 무대에서만큼 빛나고 섬세해서 좋았다. 무대위에서 본 사람에게 배우는 그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해야 좋을지 모를만큼 무대는 그렇게 신성한 곳이라면 그 무대를 올라가기 위해 연습하는 연습실은 더없이 성스러운곳이 될 수 밖에 없는것일테지. 굳이 멀리서 알려고 하지 않아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여주는 춤의 백미는 연습실에서 흘리는 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발레학원에 또 가고 싶은가 보다. 반바지에 레오타드만 입고 점프를 해도 하늘 끝까지 올라갈 것 같은 그 느낌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더없이 행복하고 기분 좋았던 그 봄날의 오후를 나는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




대문사진: 김윤식 사진작가.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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