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꺾여버린 도전

침묵의 언어에 도전하다

by 이선준

드라마를 보다 보면 소리 없이 손짓과 표정으로 대화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애초에 소재 자체를 이러한 대화로 잡은 드라마들도 있다. 처음 내가 소리 없는 대화를 인식한 것은 뷰티 인사이드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 덕분이었다. 여자 주인공은 극 중 유명한 배우였는데, 소리 없는 대화를 시도하는 어린 팬에게 아무렇지 않게 똑같이 소리 없이 대화를 이어나가는 장면을 보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른 무언가를 느꼈다. 이때 이러한 소리 없는 대화에 대해 찾아보았고, 이것들이 수화 또는 수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았다. 소리 없는 대화인 수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들 중 그들의 문화를 익힌 '농인'이라는 집단에서 사용하는 의사소통 수단, 즉 언어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수화'라고 불리던 명칭이 몇 년 전 언어로 인정받으면서 '수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수어를 처음 알았을 때 당시에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다가 몇 년 뒤 이 언어를 중심적으로 소재로 한 드라마인 '반짝이는 워터멜론'을 보고 처음 느꼈던 가슴 끓어오름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이 드라마의 소재는 정확하게는 코다인데, 즉 청각장애인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을 그들이 농아인이든 아니든 부모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수어를 알아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농문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드라마를 보고 있으니 나도 직접 수어를 통해 대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나중에 수어를 배워보아야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다.

그러고 몇 년 뒤 나는 수어 통역사 자격증 필기 시험장에 앉아 있었다. 그냥 시험 한번 봐볼까라는 생각에 시험 접수를 하였고, 시험공부를 미루다가 시험 일주일 전에 불이 나게 책을 폈다. 처음 보는 낯선 이야기들이 가득했고, 내가 알지 못했던 의식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시험공부에 임했다. 정말 운이 좋게 수어라는 단 한 수어를 단 한 자도 할 수 없었지만 수어 통역사 필기시험에 합격하게 되었다. 약간 어안이 벙벙하긴 했지만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라는 약간의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리고 필기 공부를 하면서 한 가지 반성했다. 내가 이 시험에 임하는 자세와 마음가짐, 조금 더 나아가 나중에 그리고 봉사활동을 해야겠다는 오만한 생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나뿐만 아니라는 것이다. 나처럼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서 수어 통역사 자격증을 딴 사람들이 많다. 이 자격증이 있다면 수어 통역사로서 이 일을 할 수 있지만 절반도 안 되는 사람들이 이 업을 전업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어 통역이 정말 필요한 사람들은 대부분 평일 오후인데, 수어통역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본업을 하고 있어서 정작 필요한 사람들이 수요에 공급을 못 미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약간 망설였다. 내가 과연 수어를 단순히 취미로 하는 것을 넘어서 이렇게 전문적인 자격증을 목표로 공부하는 게 맞는 것인지, 또 내가 정말 내가 내가 정말 간절한 누군가의 기회를 넘어서서 박탈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이러한 생각을 하던 와중, 필기시험이 끝나자마자 신청해 놓은 수어 강의의 개강일이 다가왔다.


설레는 마음 걱정되는 마음을 가지고 딱 수업에 들어갔다. 수업이 진행되었지만 정말 고요했다 고요했지만 열정적이었고, 나는 그 열정을 따라가기에 아직 너무 이른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강사님의 따끔한 일침이었다.

”남자분 수어 초급반 강의 안 들으셨죠? “

채팅으로 날아온 메시지에 나는 빠르게 두 팔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나는 먼저 든 생각이 남자분 나를 이야기하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답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그 뒤에 약간 거센 투로 나의 이름을 붙여서 다시 물어봐서 그제야 그게 나인 줄 알았다. 근데 그 순간 묘한 기분 나쁨이 느껴졌다. 이름이 딱 쓰여 있는데 남자분이라고 불려진 게 왜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기분이 나빴다. 이런 묘함을 뒤로한 채 강사님이 이어서 하는 채팅을 보았다. “이 강의는 원래 초급반을 듣고 있어야 하는 건데 그 그래도 이왕 온 거니 열심히 하세요”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분명 문의했을 때는 이 강의를 수어를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무관하다고 안내를 받았는데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하시니까 내가 벙 쪘다. 심지어 내 입장에서는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더 열심히 하라는 소리를 듣다니. 내가 이 수업을 몇 번 듣고 나서 복습을 안 해서 못 따라가는 상황이라고 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첫 수업한 지 1시간도 안 되어서 저런 이야기를 듣는 게 나로서 좀 속상했다. 속상한 마음을 뒤로한 채 수업을 어찌 됐건 간신히 마무리했다.

모든 게 처음이라 낯설어서 긴장하고 강사님 눈치도 보고 마음은 속상하고 2시간 수업이 인연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주 4회 수업을 듣는다면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아 결국 수업 듣는 걸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알아보니 수강 취소는 안 되고 수강에 계속 불참하면 다음에는 수업 신청을 못한다고 하여 진퇴양난에 빠졌다.

분명 다른 수업을 듣고 싶은데 나의 한순간의 결심으로 수어를 못 배우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모순적인 게 포기라는 선택을 했으면서 수업은 수어 수업은 계속 듣고 싶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한 내가 열정이 있으면서도 없다는 아이러니한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어 교육 기관에 전화를 하여 상황을 설명드렸다. 그랬더니 상당 직원분이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 듯이 나에게 위로를 건네며 원래 농인분들이 어투가 좀 세다며 속상한 마음을 공감해 주셨다. 그리고 대안으로 수강 취소는 안 되지만 수강에 불참해도 다른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래도 좋게 해결되니 마음이 좀 놓였다. 내가 노인분들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했다는 반성을 했고, 난 아직 수어를 배우기에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같이 했다. 또 한편으로는 강사님이 농인이시기 전에 그래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님인데 그런 부분에서 조금만 더 배려해 주셨다면 어땠을까라는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안 그래도 수어 통역사 자격증 따기를 망설이는 와중에 이런 일까지 벌어지니 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진지하게 며칠을 더 고민했지만 정답은 하나였다. 포기하지 않고 일단 앞만 보고 달리는 것. 평일 오후에도 수어 통역사로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을 내면 되는 것이고, 내가 꼭 수어 통역사 실기에 합격하라는 법이 없으니 그냥 일단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더 많은 혼란스러움이 생기기는 했다.

어느 날 뉴스를 보니 농아인 협회에 비리 관련 내용을 접하게 되었고, 도전하려는 마음에 누구가 의도적으로 망치질을 하는 게 아닌가 마냥 위태로웠다. 아슬아슬했지만 그래도 도전하려는 나의 의지에 스스로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일들로 더 단단해지고 더 많은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누구에게나 도전은 힘든 것이고, 그걸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지가 핵심인데, 그 핵심 중에서도 핵심은 그냥 하는 것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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