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_by 지니
저는 그렇게 교사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길에는 임용고시라는 높은 벽이 기다리고 있었죠. 당시 교직 논술이나 교과 관련 논술 등 다양한 변화가 시험에 도입되면서, 공부해야 할 내용과 전략이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학원 규모, 고시원 수, 합격률 등을 토대로 한 추정치로는 5,000명~10,000명 사이 학생들이 노량진에 있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저는 대학을 마치자마자 생활관 운영팀의 행정 조교로 일하며 학원비를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업무는 약 100여 명의 관생들을 지도하며 입소식과 규정 지도, 상벌점 부여 등을 담당하는 일이었습니다. 대강당에 모여서 마이크 없이도 관생들 앞에서 입소식을 시작했죠.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생활관 운영팀에서의 일은 이상하게도 제게 잘 맞았습니다. 규정과 규율을 엄격히 정해 놓고 그 안에서 사람들을 통제하는 일이 저와 잘 맞는다고 느꼈습니다. 새벽에 하는 소방 대피 훈련에서는 '불이야!'를 외치며 모두를 대피시켜야 했는데, 1층부터 4층까지 모두 확인한 뒤에 제가 제일 마지막에 나와야 했습니다. 실제로 불이 났다면, 관생들을 위해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렇게 행정 조교로 1년을 보낸 후, 인생 첫 임용고시에서 탈락의 고비를 맞이했습니다. 그 후 약 10개월 동안 노량진 고시원에서 생활하게 되었죠. 높은 학원비와 생활비 부담, 과도한 월세는 물론 좁고 밀폐된 고시원에서의 생활은 큰 스트레스를 안겨주었습니다. 사회적 고립감과 학원 앞 줄 자리를 차지하려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정신적인 부담이 점점 커졌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공부해서 교사가 되었을 때, 내가 기대한 것과 현실이 다르면 어떡하지?"라는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간제 교사로 먼저 시작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생활관 운영팀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저를 어필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저는 고등학교 1학년과 3학년에서 각각 문학과 비문학 수업을 담당하는 (기간제)교사가 되었습니다.
젊은 교사로서, 상대적으로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저는 사회 경험이 겨우 1년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연륜이 풍부한 선생님들의 인생 경험과 노하우에 비해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또 본교사가 돌아올 때까지 큰 변형이나 무리 없이 교실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대체 교사로서, 늘 말과 행동에 더욱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고민과 신중함 속에서, 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학생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시험에 대한 불안감과 스트레스, 수능과 미래에 대한 압박감에 사로잡힌 학생들을 보며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교사로서 공부를 포기하지 않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교과서 밖의 세상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길로 제 발걸음은 점차 청소년지도자 쪽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