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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랜드 May 09. 2021

엄마, 심심해보여..

아이의 눈에 비춰지는 엄마의 기분


기분 좋게 일어난 일요일 아침, 키즈카페에 가고 싶다는 아이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남편과 나는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여기가 낫네 저기가 좋네 한참 이야기를 오갔을 때쯤, 조용한 아이가 궁금해져 슬쩍 봤더니 종이에 볼펜으로 토끼를 잔뜩 그려놨다. 너무 귀엽게 그려서 흐뭇한 미소를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는데, 어른 의자에 앉은 아이의 자세가 영 불편해 보였다. 자세를 잡아주다가 놀란 토끼 눈이 된채 멈춰버린 곳이 있었으니..의자에 마구마구 그어져있는 볼펜 자국이다. 하아..어떡하지..패브릭 의자인데 말이다. 표정 관리 전혀 안된채 괜찮다는 말도 못해줬다. 아이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말이다. 물티슈로 벅벅 문질러보지만, 지워질리가 없다. 급한 마음에 매직스펀지까지 동원해 가루가 될 정도로 문질렀지만, 당연히 효과 없었다. 절망이다.


나는 모든 물건을 조금 지나칠 정도로 소중하게 아껴 쓰는 편이라 낙서, 오염, 손상에 굉장히 민감한 편이다. 살면서 스스로도 굉장히 고치고 싶은 부분이기도하다. 아주 가끔은 쓸모 있는 순간이 있기도 하다. 아주가끔.


아이와 사는 집에서는 꼭 버려야 할 성격 중 하나일텐데 참 미련스러울 정도로 여전하다. 그동안은 그냥 그러려니 넘어간 부분이 많았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오늘은 조절이 안됐다. 아이가 보지 않는 곳에서 남편에게 하소연을 하며 울컥하기까지. 왜 그랬을까 진짜.

그러고도 오전 내내 아이에게 따뜻한 말 제대로 못 해주고서는 차갑다 못해 냉랭한 집안 분위기를 엄마인 내가 만들었다. 얼마나 얼음장같이 시려웠을까. 차라리 마스크라도 쓰고 있을걸 그랬다. 표정이라도 가려줄 수 있게 말이다.

아침으로 빵을 챙겨주며 영상을 보여줬다. 가만히 있으면 그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무작정 거실과 책장을 뒤집었다. 쓰레기가 어찌나 많이 나오던지 박박 찢어가며 다 버리고, 아이의 월령에 맞지 않는 책은 다 정리해 베란다에 내놓았다. 장난감도 정리하며 곳곳에 쌓인 먼지들도 닦아냈다. 금새 어질러지겠지만 말이다. 많지도 않은 분리수거까지 다 내다버린다. 결과물을 보니 가끔 이렇게 정신 없이 화가 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지만, 정신 건강에는 1급 발암물질이겠다며 급 생각을 고쳐먹는다.


약속된 오후 일정이 있어 나갈 채비를 했다. 얼마나 아무 생각이 없었으면 옷만 껴입고 얼굴엔 하나도 바르지 않은채 마스크에 얼굴을 구겨 넣고 정신없이 나갔다. 또 아무것도 안하고 차에 앉아만 있으니 눈물이 난다.

뭐가 문제지 생각하면 이것저것 줄기차게 떠오르지만, 결국 그냥 내 잘못이고 내 문제인걸로 종결된다. 그래서 그토록 문득문득 울컥하고 주르륵 눈물이 흐르는걸까. 정말이지 쉴새없이 울고 또 울었다.


차에서 내려 잠깐 아이와 둘만 남겨진 시간이었다. 아이에게 물었다.

"아침에 기분 괜찮았어?"

누구에게나 안 좋은 기억이나 상황을 다시금 들춰내는 건 상처난 곳에 소금 뿌리는 격인데..그걸 알면서도 생각없는 엄마는 다시 덧붙여 물어본다. 바보같이.

"아침에 엄마 기분이 많이 안 좋았지?"


그런데...생각지도 못한 답변에..웃었다. 최악의 하루라고 생각하고서는 처음으로.

"아니, 심심해보였어. 엄마가"


아..아무 말도 표정도 없이 밥 챙겨주고 옷 입혀주고, 사이사이 끊임없이 정리에 청소만 하던 날 보며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할 말을 잃었다.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웃음은 어이없어서 그랬는지 귀여워서 그랬는지도 잊은채 말이다.


그때부터 아이 입장으로만 머릿속이 가득해졌다. 아침부터 그 차디찬 분위기에 견뎠을 작은 몸과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을지. 나의 하소연이 귀에 다 박히며 들렸을지. 거칠게 정리하던 그 소리. 다 미안하다 전부. 심심해 보였다는 말 끝에 아이의 나이에 다소 표현하기 힘들었던 다른 감정들이 깔려있을거라 생각하니 또 자책하느라 우울모드로 급 발진한다.


'내가 그 곳에 볼펜과 종이를 두지 않았더라면..' 하는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된 사건의 일말은 결국 잘 정리되어 마무리되는 듯하지만, 당분간은 또 문득문득 내 성격의 문제를 거론하며 스스로 롤러코스터에 태우겠지. 미리 떠올리니 또 답답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이 또한 내가 견디고 겪고 전환해내야하는 숙제일테다. 쉽지 않다. 내 마음도 이리 알아채고 이해해주고 다스리기 힘든데, 상대방의 마음은 어찌 알아준단 말인가. 하물며 아이의 마음까지도. 인생도 사람도 나도 너무 어렵다. 답이 있는 수학 문제가 정말 쉬운거였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수학 공부라도 열심히 해서 정답을 많이 맞춰봤어야했다. 그때라도 성취감과 뿌듯함에 파묻혀 봤어야 했던거였는데....하아 어려웠고, 어렵고, 어려워질 내 인생.



내 인생의 주인이 나라서,

당신의 배우자가 나라서,

딸아이의 엄마가 나라서,

그냥 그저 속절없이 미안하기만한 날이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었더라면,

당신의 배우자가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었더라면,

딸아이의 엄마가 나보다 더 멋진 사람이었더라면,

얼마나 더 많이 웃으며 풍요로운 마음으로 지냈을까 생각해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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