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이랜드 Oct 30. 2021

화내는 게 제일 쉬웠어요

화가 많은 아이, 우는 아이 훈육이 가능할까


엄마들은 아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생각한다. 대개.

아이들은 엄마가 나를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나를 비롯한 엄마들은 아이 행동의 일부를 사전적 정의가 있는 것 마냥 예견한 상태로 말을 시작한다. 이 말인즉슨, 예상했던 그 행동이나 대답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미리 생각한 그것이 아닐 경우 '틀렸다'라고 생각하여 바로잡거나 가르치려 한다. 그저 다를 뿐인데 말이다. 솔직히 미처 시작하지도 않은 대화에서 미리 정답을 내려버리는 어른들의 고정관념이 너무 뿌리 박혀 있는 탓이기도 하다.


소위, 답정너. 괜히 만들어진 말이 아니다.


수학 문제지처럼 마지막 장 모범 답안지를 들춰보듯 아이의 모든 말과 행동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려내기엔 너무 많은 경우의 수가 혼재되어있다. 수학 공식처럼 누군가 정해놓은 틀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보지만 그것 또한 누구에게나 정답 일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정답지를 들여다보는 어른들은 얼마나 피곤한 1분 1초를 지내고 있는 걸까. 갑갑하다.


4살을 맞이한 작년 1년, 훈육이란 말을 써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아이의 모든 말과 행동은 얼렁뚱땅 그 자체였다. 당연히 눈에 보이는 훈육의 결과는 기록할만한 게 많지 않다.


5살을 맞은 올해 초부터는 같이 울었던 기억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떼쓰고, 울고, 화내고. 한 가지만 해도 들어주기 벅찬 일이거늘 한꺼번에 쓰나미처럼 몰려오니 감당해내기 힘들었다. 5살 중후반쯤 되자 소통을 기반으로 한 대화가 조금씩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훈육’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올바르게 쓰이기 시작하는 때가 이쯤이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아이가 떼를 쓰는 행동.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본인의 모든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나오는 원초적이면서도 지극히 정상적인 표현이다. 마치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달려든다, 떼를 쓰며. 달리는 경주마를 멈추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말의 길을 가로막는다? 눈높이가 다른 말의 앞을 막는다는 건 세상과 이별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밟혀 죽지 않으면 다행인 일.

말의 다리를 잡는다? 잡을 수나 있을까. 힘의 정점을 발휘하고 있는 그 순간 다리를 잡았다한들, 둘 다 큰 일 치르기 딱 좋은 상황.

그럼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단 하나, 도착 지점이다. 본능적으로 달리게 된 말이 한 번의 훈련으로 정해진 곳에 멈출 수 있었을까? 같은 시간, 같은 방법, 같은 행동을 수 없이 훈련받아 달려온 탓에 움직이는 기계와 같아진 것이다. 태엽 감은 장난감 말처럼 말이다.


아이에게 이 같은 바를 바라는 건 아니다.

아이에게 경주마를 대하듯 하자는 건 더더욱 아니다.

아이의 말을 가로막아 무시하고, 강압적으로 힘을 행사해 아이를 무력감에 빠지게 만드는 방법. 그럼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방심한 사이 노출하게 되는 데는 우리 모두가 어색함이 없어서이다. 지금과는 다르게 결핍이 많았던 그 옛날, 살아보지 못한 아주 먼 옛날 그때만 당연하게 겪어낸 원초적인 방법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울부짖음을 멈추게 할 정답이란 건 애초에 없다. 단, 울부짖기 전과 후의 말과 행동에 집중한다면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그때 진심이 담긴 메시지를 작지만 강력하게 던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은 서로가 침착할 수 없는 매우 정신없는 상태이므로 누구든 놓치기 십상이다. 조금만 이성의 끈을 잡고 귀를 귀울여보자. 우리 아이의 지저귀는 목소리가 갸냘프게 들려올 것이다.


아이의 행동에 따라 엄마의 희로애락도 시시각각 변한다. 함께 즐겁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대개 아이의 감정에 집중하고 공감해야 한다고 말한다. 당연히 맞는 말, 반드시 우선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다. 여기서 그친다면 같은 일이 반복되었을 때 금방 지쳐 모두 놓아버릴지도 모른다. 소중한 '나'의 감정도 들여다봐줘야 한다. 왜 아이의 행동에 어른인 내가 화났을까(혹은 기분이 나쁠까, 슬플까 등), 어떤 부분이 그런 감정을 들게 한 걸까. 시간을 들여서라도 꼭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아야 할 일이다. 그렇게 나 자신과의 소통이 가능해져 스스로를 잘 알게 된다면 아이의 떼도, 엄마의 큰 소리도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다.


훈육이라는 종착지도, 정답도 없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기엔 우리의 삶이 그리 여유롭지만은 않다.

돈도 벌어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놀러도 가야 하고, 잠도 자야 하고 이것만 해도 이미 하루 24시간을 다 쓴 기분인데 언제 또 공부해서 훈육에만 매달려 있겠는가.


적당히 아이 마음의 소리도 들어주고

적당히 내 마음의 소리도 들어주며

적당히 방전되지 않는 선에서 아이와의 하루가 행복할 것.


모든 부모의 공통된 바람이  많은 사람들에게도 불어와, 행복에 닿는  순간을 많은 사람과 나눌  있길 오늘도 적당히 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 거리두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