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성과 과학, 그리고 철학
2014년 티스토리에 썼던 글.
놀란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라 일단 믿고 봤던 인터스텔라. 기대도 많이 했었다.
3시간의 긴 러닝타임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봤다. 흥미진진한 전개, 과학현상의 실제화, 그리고 갈수록 화려해지는 스크린도 한 몫을 했지만 그보다는 감독이 던지고 있는 메시지가 너무 많아 하나씩 곱씹다보니 3시간이 다 가버렸다.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두번째 볼 때 그 메시지들이 좀 더 확실해지는 것 같았다.
수많은 인터스텔라 후기들이 있지만 기독교적 관점이 조금 섞인 후기를 써 보려고 한다. 내가 보는 관점이 감독이 의도한 것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지만 내가 이렇게 해석을 했다면 보시는 분들도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 이 관점은 맨 마지막 4번을 설명할 때 주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은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후기를 써볼까 한다. 그 중에서 특히 대립각이 있다고 생각하는 등장인물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두 번을 보니 확실히 등장인물별로 주는 메시지가 느껴졌기 떄문이다.
목차
1. 쿠퍼 vs 아멜리아
2. 머피 vs 톰
3. 브랜드 교수 vs 만 박사
4. '그들' vs 우리
5. 마무리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두 사람이다. 그렇기에 두 사람이 영화 내에서 지니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또한 클 것이다. 둘 다 같은 임무를 지니고 떠났고, 사랑하는 가족을 지구에 두고 떠났다. 비슷한 점을 많이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이 두 캐릭터가 어떻게 발전하는지가 영화의 핵심 관전포인트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쿠퍼 (메튜 멕커너히)는 전 우주선 조종사였지만 추락을 한 번 경험했다 (이유는 나중에 중력이상으로 밝혀짐). NASA가 공식적으로 '없어진' 이후 옥수수 농부가 되었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저 하늘너머 우주를 궁금해 하는 모험가다.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순응해서 사는 한 인간이지만 항상 지구 너머를 꿈꾸는 이상주의자이기도 하다.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먹고살기에 바빠져 인간의 본성인 모험가기질(explorer)을 잃어버렸다고 불평하는 장면은 그가 영화 후반부에 어떠한 역할을 맡을지 미리 알려주는 뻔한 복선이다.
그 아이를 내일 게임에 데려가야겠어요
(학부모 상담 中)
쿠퍼는 또 두 자녀의 아빠이기도 하다.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난 외로운 아빠로 나온다. 그래서 그런지 자녀들하고 허물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자상한 아버지로 나온다. 아들이 공부를 못해도, 딸이 학교에서 싸워도 자녀들 편이다. 하지만 자녀들을 사랑해서라기 보단 현실에 대한 불만이 그로 하여금 자녀들을 더 감싸게 하는 듯하다.
영화 3분의 1지점부터 숨겨진 NASA의 존재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아멜리아(앤 해서웨이 역)이다. 천재 물리학자 아빠 (브랜드 교수)를 닮아 머리부터 외모까지 완벽해 보이는 엄친딸이다 (심지어 노래도 잘 부른다.. 레미제라블을 보라). 생물을 전공해서 플랜A가 실패할 경우 플랜B를 현실화 시키는 것이 주 업무이다. 내가 생물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왠지 모를 동지애(?)을 느꼈다고나 할까. 어쨌든 아멜리아는 초반에 임무를 함께 수행함에 있어 굉장히 냉정한 인물처럼 나온다. 쿠퍼가 가족 얘기를 하자 얘기를 하지 말아야 할 때도 알아야 한다며 딱 잘라말할 때는 아.. 앤 해서웨이 이번에는 악역인건가 하고 잠시 절망했지만 다행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블랙홀 옆에 있는 밀러 행성. 이 행성에서의 1시간이 지구의 7년이기 떄문에 1분1초도 낭비하지 않아야 하는 엄청난 압박을 받으며 내려갔던 이 행성에서 그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산'을 만나게 된다. 쿠퍼가 곧 그것은 산이 아니라 파도라는 것을 알고 두번째 파도가 밀어칠 것을 직감, 데이터 수집기를 찾으러 간 일행에게 당장 돌아오라고 한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데이터 수집기를 찾기 전에는 못 간다고 고집 부렸고 끝내 팀원 한명의 목숨과 지구에서의 23년을 잃어버리는 엄청난 대가를 치루게 된다.
우주선 안에서 그들이 싸운다. 자식들이 기다리는 지구로 가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길어져 화가 난 아빠와 임무만을 생각한 과학자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가녀린 아멜리아의 울며 I'm sorry Cooper 한마디로 싸움은 손쉽게(?)종결된다. 이 때부터 쿠퍼와 아멜리아의 캐릭터가 조금 바뀐다. 쿠퍼는 더 냉정해지고, 아멜리아는 더 감성적이 된다. 마치 인생에서 엄청나게 큰 일을 겪은 사람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두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밀러 행성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으로 판명나고 다음 행선지를 정할 때 쿠퍼와 아멜리아는 또 대립하게 된다. 쿠퍼는 현실적으로 생각해 가장 최근까지 신호를 보내왔고, 또 거리도 가까운 만 박사가 있는 행성을 택했지만 아멜리아는 자신의 가슴이 말하는 곳, 자신의 사랑이 있는 에드먼드 행성을 택했다. 뭐 아멜리아가 무작정 가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에드먼드가 보내온 행성 데이터도 만 박사 못지않게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쿠퍼를 설득할 수 있는 근거가 아멜리아에겐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핵심 포인트 중 하나가 아멜리아의 그 다음 대사에서 나왔다:
우리는 어쩌면 이걸 이론적으로 이해하려고 오랜 시간을 쓴 것일지도 몰라요.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우리가 아는 유일한 것이에요. 어쩌면 더 높은 차원이 존재한다는 증거일지도 몰라요. 아직 이해는 못하지만 믿어보기는 하자고요.
아멜리아가 이 대사를 칠 때 감독의 의도가 하나 큼지막하게 드러난 것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과학자 자신이 인류를 대표한 자리에서 저런 대사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상적이 되어서가 아닐 것이다. 무엇인가 아멜리아 안에 눌려있던 생각들을 한번에 터뜨리는 느낌이었다. 이 짧은 대사 안에서 과학이라는 '이론'에 대한 회의가 느껴졌고, 사랑으로 표현된 더욱 고차원적인 가치에 대한 갈급함이 느껴졌다. 이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쳤을 때의 답답함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아멜리아의 대사처럼 놀란 감독은 아직 이해를 못했기에 고차원적 세계를 더욱 궁금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호기심를 표현한 결정체가 나중에 나오는 5차원의 세계라는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영적인 영역까지 건드리는 것이다. 이 부분은 후반부에 자세히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무튼 위 아멜리아의 대사가 영화를 처음 보고 나서 가장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었다.
또한, 사랑보단 이성을 택해 도착한 만 박사 행성에서 뼈아픈 배신을 당하는 구도는 정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항상 옳은 일인가 의구심을 가지는 감독의 의도를 볼 수 있었다.
쿠퍼나 아멜리아나 결국은 자신이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사람 곁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멜리아는 쿠퍼의 희생 덕분에, 그리고 쿠퍼는 '그들' 덕분에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간다. 어떻게 보면 자력으로 돌아간 사람은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해피엔딩! 이라고 하기에는 그 과정에 내포되어 있는 인간의 무력함이 너무 큰 것 같다.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어쩌면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다' 라는 영화의 주제를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론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말이다.
쿠퍼의 작은딸 머피와 큰아들 톰. 쿠퍼와 아멜리아 보다 더 명확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이 두 캐릭터는 과연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생각해봤다.
영화를 보고 나면 머피의 이름이 영화의 주제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머피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머피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배우가 3명이나 동원되었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아빠를 닮아 하나에 꽂히면 주먹다짐을 할 정도로 그 가치를 굳게 지키며 차에 숨어타는 대범함을 앞세운 모험가적인 기질이 강하다. 어린아이답지않게 자신의 방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과학적으로(비록 말로은 유령이라고 했지만) 분석해내는 것을 보면 감탄을 하지않을 수 없다. 아마 내 딸이 이런다면 자랑스럽겠지만 솔직히 좀 무서울 것 같기도 하다 (감당할 수 있을까 해서 말이다).
영화를 그냥 생각없이 봐도 톰은 머피에 비해 훨씬 더 투박하고 고지식한 것을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과학적 유전자는 머피에게로 몰빵됐는지 학교 성적은 형편없지만 아빠 뒤를 이어 농부가 되겠다는 대견한 아들이다. 농부가 되는것에 대해 딱히 불만도 없다. 꿈도 없는 너무 현실순응적인 캐릭터같아 보이지만 톰은 그런 컨셉의 캐릭터인 것이다. 그는 아빠가 떠나는 순간에도 아빠의 트럭이 몰고 싶었던 소박한 소년이었다. 이렇게 영화 초반에는 머피는 똑부러지지만 고집센 여자아이, 톰은 둥글둥글하고 소박한 남자아이로 나온다. 하지만 아빠가 떠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들은 대립하기 시작한다.
당시 최고 물리학자 밑에서 (추측컨데) 개인교습을 받은 엘리트 머피, 열악한 환경때문에 올해 농사가 망한것을 보며 내년에는 나아질거라고 말하는 톰.
"내년에는 나아질꺼야." 라고 다들 말하곤 하지. 하지만 그 다음해가 되어도 나아지
는 건 없어.
이 대사는 쿠퍼가 장인어른과 집 앞에 앉아 현실에 안주하는 현대인들을 안타까워하면서 했던 대사이다. 그런데 그 '내년에는 나아질거야' 대사를 다른 사람이 아닌 쿠퍼의 아들인 톰이 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망한 옥수수밭을 불태우며 말이다. 어쨌거나 누군가는 농사를 지어 먹을 것을 생산해야 하는 현실에서 아둥바둥 살아가는 톰. 그리고 나사에서 이론 물리학자로 성장해가는 머피. 어찌보면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표현한 것 아닐까.
쿠퍼가 떠난 이후에도 머피와 톰은 아빠에게 영상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아빠는 우릴 버렸다고 생각하는 머피는 몇십년동안 한번도 메시지를 남기지 않는다. 반면, 톰은 인생의 중요한 이벤트마다 쿠퍼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차석으로 졸업했을 때, 애인이 생겼을 때, 첫아이를 낳았을 때, 그리고 첫아이를 잃었을 때. 그러한 메시지를 보며 함께 울고 웃는 쿠퍼를 보며 아마 많은 이들도 같이 눈물을 흘렸을 것 같다. 생각할수록 명장면인 것 같다.
톰이 이렇게 메시지를 남겼던 이유는 이 메시지를 아빠가 언젠가 볼 것이고, 아빠가 언젠간 돌아올것이라는 무언의 믿음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톰의 믿음은 그의 마지막 영상메시지에서 바닥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는 아빠를 놓아드리려고 해요.
쿠퍼가 톰에게 들은 마지막 한마디였다. 그리고 톰은 쿠퍼의 인생에서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끝이 나나 했는데 앗, 어느덧 중년이 된 딸 머피의 모습이 나온다. 생일을 맞이했는데 지구상의 아빠와 같은 나이가 된 기념비적인(?) 생일이라 메시지를 남긴다는 핑계로 시작하지만 끝내는 돌아오라고 울음을 터트리는 머피를 보며 톰과 머피의 역할이 바뀐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바뀐것이 아니라 머피는 행동은 툴툴거렸지만 마음 속 깊이 아빠는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반대로 톰은 아빠에게 그렇게 꾸준히 메시지도 보내고 했지만 나중 대사에 나타나듯 아빠의 공백에 대한 분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나를 키운건 할아버지야.
결론적으로 톰은 최소한의 소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가 일정 기간 돌아오지 않자 없는 사람 취급해버렸다. 하지만 머피는 아빠가 날 버리고 갔다는 원망감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음에도 그 마음가운데에는 아빠가 돌아오리라는 믿음(혹은 사랑)이 있었다.
뜬금없지만 성경의 예화가 생각났다 - 어떠한 지시에 대해 '예' 라고 말했지만 순종하지 않은 아들과, 처음엔 '아니오' 라고 말했지만 뉘우치고 가서 순종한 아들의 예화 말이다. '놀란 감독이 성경을 풀었나??' 라는 생각이 스치긴 했지만 설마 그럴리가.
머피는 어떤가, 아빠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내면에 안고 있으면서도 머피는 아빠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늙은 머피의 대사에서 엿볼 수 있다.
Because my dad promised me.
"우리 아빠가 약속했으니까요." 라고 자막에 번역되었던 것 같은데 '우리 아빠' 라는 대목이 참 정겹게 번역이 잘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증거는 그 대상을 끝까지 믿는 것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놀란 감독은 한번 더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까메오 스포나옴)
뭐 스포라고도 할 게 없구나. 이미 멧 데이먼이 까메오로 나온다고 널리널리 알려져 있으니. 하지만 나는 영화를 처음 볼 때 멧 데이먼을 잘 못알아봤다. 살이 쪄서 그런지 뷰티풀 마인드의 러셀 크로우를 묘하게 닮았었기 때문. 서양배우들은 살이 찌면 일반화가 진행이 되는건가ㅋㅋㅋ
아무튼 브랜드 교수(마이클 케인 역)와 만 박사(멧 데이먼 역)는 겉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비슷한 것 같다.
브랜드 교수는 플랜A를 현실화 시키기 위한 중력방정식을 풀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 브랜드 교수가 지구에서 플랜A를 위해 노력했다면 만 박사는 직접 웜홀을 통과해 인류의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난다. 둘 다 플랜A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건 것이다. 또한, 그들의 용기있는 행보로 인해 사람들이 희망을 갖게 되는 점 또한 공통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 안에 있는 아무도 모르던 공통 분모가 하나 더 있었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희생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브랜드 교수의 목적은 인류의 생존과 번식이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지구에서 가장 탁월한 사람들을 웜홀로 보냈고, 그 사람들이 떠날 명분을 주기 위해 자신의 실패를 숨겼다. 만 박사의 초기 목적은 인류의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실패를 깨닫고 나자 다시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 새로운 제2의 목표가 되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구조해준 사람들의 목숨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영화 내의 구상으로 봐서 브랜드 교수나 만 박사나 같은 부류로 나오는 것 같다. 만 박사는 지 혼자 살고 싶었던 나쁜놈이라고 쳐도 브랜드 교수는 인류를 살리고자 하는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허나 그것이 아무리 크다 한들 결론적으로 주위사람들을 속인 꼴이 되니 브랜드 교수 또한 '너도 나쁜놈'이 되어버린 것이다. 진실성이 결여된 목적성은 결국엔 인터스텔라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믿음과 사랑)에 반대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이 악역이 되어버린 듯하다.
우리는 선한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에요.
거기에 나도 포함되는거야?
아멜리아와 쿠퍼가 우주선 안에서 했던 대화이다. 존재론적인 것에 관심이 많은 놀란 감독이 이런 대사를 쳤다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 했지만 만 박사의 갑작스런 (하지만 계획되었던) 배신을 보며 역시나 했었다. 만 박사는 선하다고 생각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인류를 대변한 셈이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아멜리아 같은 사람들을 순진하다고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랄까.
브랜드 박사와의 경우는 조금 더 복잡하다. 선과 악의 개념이 모호해지는 부분 때문이다. 브랜드 박사는 모두를 속이더라도 인류를 보전하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이들에게 있어선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선'이 보편적인 선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꼬집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적 선' 이라는 것이 있을까? 존재론적인 것에 관심이 많은 감독들이 많이 하는 질문인 것이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크리스천이 경각심을 가지고 분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절대 선'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니까.
자연스럽게 후기가 점점 철학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ㅋ 어쩔 수 없지. 놀란 감독이 영화에 자신의 철학을 한 무더기 담았으니 그 메시지를 어떻게 받았는지 글적이는것이 영화 후기 아니겠는가.
감독의 철학은 영화 후반부 쿠퍼가 블랙홀 안으로 들어감으로 그 절정에 이른다. 영화 초반부터 일컬어졌던 '그들'에 대한 정체가 나름 밝혀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후반부 때문에 이 영화가 반기독교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내 생각은 글쎄, 이 영화가 반기독교적으로 느껴질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냉정하게 보면 감독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중립적인 입장을 지킨다고 생각한다. 놀란 감독이 무신론자라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여겨지는 것을 감안하면 구도자의 입장에서 전개해 나가는 영화인 것이다. 그렇다고 조심할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깐 한번 찬찬히 살펴보자.
소망이 없는 지구에서 한줄기 희망의 빛을 비춰준 존재가 바로 '그들' 이었다. 그들이 토성 옆에 시공간이 왜곡된 웜홀을 만들어 놓음으로서 인류로 하여금 새로운 터전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웜홀을 어떻게 통과하는지, 통과한 후에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살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그리고 결국엔 에드먼드 행성이라는 지구의 환경과 비슷한 행성을 찾게 된다 (아멜리아가 맨 마지막에 헬멧을 벗고 햇살을 맞는 장면). 영화를 보며 '그들'을 놀란은 누구라고 지칭할까 궁금해 하면서 봤었다.
세상에 4차원도 아니고 5차원적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우리 인간은 3차원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어에서 5차원(Fifth dimension)은 흔히 미지의 세계를 일컬을 때 사용되는데 왠지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진짜 5차원적인 존재를 말하는 것 같다. 단순히 영화에서의 묘사를 살펴보면 5차원의 '그들'에겐 시공간조차 하나의 물리적 성질일 뿐이다. 우리가 점토를 가지고 조물딱거림으로 모양을 만들듯이 '그들'은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조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영화 초반에서 후반까지 우리 인간과는 아예 다른 차원의 존재들로 묘사를 하지만 막판에 쿠퍼가 뜬금없이 '그들'은 미래의 우리들이라고 한다. 현재는 3차원의 한계에 머물고 있지만 언젠간 차원의 한계까지 극복해 나가는 진화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데려온게 아냐. 우리가 우리를 데려온거지.
이 대사만 놓고 본다면 대놓고 '인간도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라는 바벨식의 해석이다. 목회자분들이나 신앙심이 깊으신 분들이 이 부분을 보면서 분개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엔 이 영화는 과학의 무한한 가능성을 위시하기 위해, 신의 고유한 영역은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한 도구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쿠퍼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것에 대한 근거가 거의 없다. 이전까지는 아무 얘기 없다가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듯한 설정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쿠퍼 혼자만의 생각이란 느낌이 든다. 너무 무리한 설정이라 생각했는지 함께 블랙홀로 같이 들어갔던 로봇 타스가 이 대목에서 균형추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이해가 되지 않아요.
쿠퍼가 이 5차원 공간은 미래의 진화된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하자 타스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당연히 로직으로 설계된 타스에게는 쿠퍼의 논리점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둘의 의견이 상반된 채로 5차원의 세계는 닫히고 그들은 블랙홀을 떠나게 된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 공간에서 감독이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인간이 자신보다 큰 존재, 혹은 상황을 대면했을 때의 반응이다. 쿠퍼는 블랙홀 안의 5차원 세계를 접했을 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세계임을 깨닫고 당황해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그 세계가 닫히자 그 흐름에 따라갈 수 밖에 없게 된다.
인간의 무력함. 이것을 감독은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인간은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존재가 무력하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어 몸부림치는 것이다. 이 몸부림이 이 5차원 세계의 주체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석할 방도가 없으니 진화한 미래의 우리라고 우기는 것이다. 하지만 타스의 반응에서 보듯이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뿐.
그래, 인간이 이렇게 무력한 존재라면 뭐 어쩌란 말인가. 영화는 이제 결말로 다가간다.
블랙홀 안의 5차원 세계에서, 타스는 묻는다. 머피가 그 시계를 가지고 갈 줄 어떻게 아냐고.
Because I gave it to her.
머피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준 것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할거라는 확신이 쿠퍼는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이 맞다는 것을 방증하듯 머피는 바로 그 시계를 가지고 나간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시계바늘의 움직임이 아빠가 보내는 메시지임을 깨닫게 된다.
어떻게 보면 어설프게 사랑으로 결말을 덮으려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이 '사랑' 이란 결론이 놀란 감독이 고민했던 존재론적인 고민에 대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존재론적인 질문에 확정적인 답을 내릴 수는 없기에 그질문에 대한 답은 물음표로 남겨뒀지만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내린 것 같다.
그것이 사랑이다. 인간보다 더 고차원적인 존재가 있다면 인간은 그 존재에 비해 한없이 초라하고 무력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인간의 무력함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결론이다.
뻔한 얘기인 것 같지만 뻔한 얘기를 그럴듯하게 하는 것이 가장 어렵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놀란 감독이 잘 해낸 것 같다.
인터스텔라는 대중성과 과학, 그리고 철학이란 요소를 3시간이란 러닝타임안에 꽉꽉 채워놓은 영화이다. 메시지도 메시지이지만 영화이기 때문에 구현 가능한 요소들을 적절히 잘 살렸다고 생각한다. 토성에 비해 너무나도 작은 우주선, 그 뒤에 숨죽이며 흐르는 클래식 같은 장면들은 영화가 아니고서는 구현할 수 없을 것이다.
보는 것 자체로만도 재미있는 인터스텔라이지만 영화가 끝난 후에도 자리에 앉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이래저래 적다보니 글이 계속 써지는 것 같다. 언뜻 보기엔 지구에서 태어나 죽기 전에 다른 행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담은 휴먼다큐&네셔널지오그래픽&가족애를 담은 영화같지만 한꺼풀만 벗겨보면 그 이면에 훨씬 많은 것을 담은 영화라는 사실이 재미있다.
참 영화라는게 감독의 철학을 잘 반영하는 엄청난 도구라는 생각을 인터스텔라를 보면서 많이 했다. 꿈보다 해몽일수도 있는 후기일수도 있지만 이런 생각할 거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