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풍년 주의
한국에서 나오기 힘든 드라마가 나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드라마는 시청 시간이 오래 걸려 잘 안보기 때문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주말 동안 정주행을 끝낸 직장 동료들이 이건 대박이라고 꼭 봐야 한다고 해서 떠밀리듯이 시작한 드라마이다. 육아 때문에 원래 내 스타일인 한 번에 몰아보기가 불가능했지만 이 드라마는 많은 등장인물만큼 감독님이 하고 싶으신 이야기도 많은 것 같아 쉬어 가며 본 것이 오히려 드라마를 잘 소화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
후기를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보려 한다. 두서없이 써 내려가다 보면 생각이 정리가 될 때가 있는데 아마 이 후기가 그럴 것 같다.
1. 드라마에 등장한 사회적 이슈들
꽤 많은 사회적 이슈들을 내포하고 있어서 신선했다.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보면: 탈북자 정착 문제, 외노자 착취 문제, 무단해고 문제, 외국인 혐오, 학벌주의, 이혼, 투기, 조폭, 자살, 동성애, 기독교, 자본주의 등 감독이 참 할 말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중에 유독 눈길이 가는 이슈가 있다면 아마 내가 고민하고 있을 이슈일 가능성이 크다. 개인적으로는 외노자 문제와 자본주의, 그리고 기독교가 내 눈길을 끌었다.
2. 사회적 약자들과 자본주의
게임을 위해 모였던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정말 다양하다. 노인, 교사, 의사, 회사원, 종교인같이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해 외노자, 탈북자, 실직자, 빚투 실패자 같이 사회안정망 경계에 있는 자들, 출소자나 조폭 같은 범죄에 연루된 사람들까지 다양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통점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이 사람들이 이곳에 모인 단 한 가지 이유가 '돈'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자본주의가 얼마나 우리 삶 속에 깊이 파고들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돈을 위해 무엇이든지 한다는 뻔한 레퍼토리임에도 오징어 게임이 특별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사회적 약자 캐릭터들의 출연 비중이다. 외노자 알리와 새터민 새벽, 둘 다 우리나라 사회안정망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사람들이다. 주인공 기훈 외에 이 게임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자세히 설명해주는 참가자는 이 둘 뿐이라는 것을 보면 감독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자 하는지 명확한 것 같다. 상습적인 임금체불의 피해자인 알리와 동포에게 사기당한 새벽의 이야기는 단순히 게임에 참여 모티브가 아닌 현실 고발 다큐였다.
개인적으로 청소년 시절을 해외에 살며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과 편견에 맞서야 했던 기억이 있고 지금은 미국에서 외노자 생활을 하고 있기에 파키스탄에서 온 외노자 알리가 어떤 심정일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또한 탈북자 3만 명 시대를 맞이했지만 정작 탈북자는 영화나 드라마 이미지로만 소비될 뿐 그들 상당수는 사람들의 편견과 무관심 속에 빈곤층으로 전락해 버린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알리와 새벽 캐릭터는 한국인 특유의 배타성과 선입견의 최대 피해자들을 잘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장 약한 고리들이 먼저 떨어져 나간다. 돈이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돈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포용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현실 세계에서는 정치인들이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정책들을 내놓긴 하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떨어지는 순간 그들은 이미 희생자가 되어있다. 바라기는, 오징어 게임이 이러한 관심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2. 평등은 공평이 아니다
5화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제목이 '평등한 세상'이었다. 사람을 매일같이 죽여나가는 게임에서 평등이라니 하고 피식했지만 생각해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게임의 룰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니까. 다음 게임을 미리 알아냄으로 이 평등함을 어긴 의사와 공모자들은 처형당하고 그 시체가 전시된다. 벙 찐 표정으로 그 시체들을 마주한 참가자들에게 나오는 안내방송이 인상적이어서 그대로 옮겨본다:
지금 여러분께서 보시는 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 세계의 규칙을 어기고, 나아가 이 세계의 순수한 이념을 더럽힌 자들의 최후입니다. 이 세계에서 여러분 모두는 평등한 존재이며 어떠한 차별도 없이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아야 합니다. 저희는 이런 불행한 사태가 다시없을 것을 약속드리며 이번 사태에 대해 참가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블랙코미디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수한 이념', '평등한 존재', '동등한 기회'를 강조하면서 그 상위 가치인 '생명'을 가볍게 무시하는 이 세계는 누가 설계한 것일까. 매년 상금으로 456억을 투척할 수 있고 그 세계의 규칙을 어기는 자들을 응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들, 바로 자본권력 아닐까. 이 게임에서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모두가 같은 룰 아래 평등하다. 하지만 게임의 룰이 평등하게 적용된다고 해서 그 게임이 공평한 것은 아니다. 만약 게임 자체가 불공평하다면, 즉 특정인에게 유리한 게임이라면 모두가 같은 규칙을 적용받는다 해도 공평한 게임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줄다리기 게임이 그 대표적인 예다. 힘이 센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게임이기에 같은 규칙을 따른다 하더라도 결과는 게임 전에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드라마에서는 할아버지의 전략과 상우의 기지로 여자와 노인이 포함된 팀이 승리하지만 어디까지나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것. 나머지 게임들은 그냥 순수한 운에 따라 등락이 결정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다리 건너기'는 시작 순서, '달고나'는 선택한 모양에 따라, '구슬 따먹기'는 홀짝으로 생사가 갈린다. 그래도 이 게임들은 최소한 자신의 선택이 들어가니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까?
4. 음악 (OST)
배경에 깔리는 음악들이 이 드라마에서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 목소리로 깔리는 (버버버버버버~ 밤 밤~바 밤~바) 음악이 왠지는 모르겠지만 진행자들의 ○△□ 마스크와 참 잘 어울렸고 전체적인 긴장감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게임이 시작할 때 흐르는 그 유명한 클래식도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정말 익숙한 곡인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찾아봤더니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다. 학부시절 서양문화사 강의에서 교수님이 클래식이 의외로 잔인한 영화와 잘 맞는다고 그랬는데 그 말이 생각나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앞으로 이 곡을 들으면 오징어 게임이 생각날 것 같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 마지막 장면의 'Fly me to the moon'이었다. 이 재즈 음악 하나가 시청자들을 공포에 질린 참가자들 시점에서 프론트맨 시점으로 한 번에 전환시켜준다. 누군가에겐 생사가 갈린 게임이 누군가에겐 한 잔 하며 즐기는 게임이란 사실이 이 음악으로 더 강조되었다. 개인적으로 탁월한 선곡이라 생각한다. 이런 재미는 영화나 드라마로밖에 표현될 수 없으니까.
5. 아쉬웠던 점
<감정 과잉 연기>
첫 번째 게임을 끝내고 갑자기 살려달라고 한 두 명씩 나와 독백을 하며 무릎 꿇는 장면을 포함해 중간중간 너무 '연극스러운' 장면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한미녀 캐릭터가 나한텐 그러했다. 연기는 잘하는데 그 연기가 공감이 잘 안 되는 느낌. 조금만 톤 다운했으면 훨씬 나았을 것 같은데 조금 아쉬웠다.
<공감되지 않는 이정재의 분노>
초반부터 막판까지 이정재의 분노는 항상 급발진한다. 여기서 급발진이라 함은 시청자가 따라가기 전에 혼자 먼저 치고 나가는 것이다. 앞으로 나타나지 말아달라는 새아빠에게 날리는 주먹질부터 시작해 할아버지와 재회하자마자 죽여버리겠다고 목을 조르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에 비행기 탑승 직전 돌아오는 것까지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 분노에 조금 더 공감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렇게 딸을 사랑하는 사람이 복수를 위해 탑승구에서 발을 돌린다는 설정은 너무 뜬금없지 않은가.
<외국인들의 어설픈 연기>
이건 한국 드라마는 거의 예외가 없는 것 같다. 내가 현재 미국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외국인들 연기가 너무 어설프다. 영어를 한다고 해서 시청자가 모를 거라 생각하나? 미드를 보다가 오징어 게임 외국인 등장 신을 보면 너무 오글거린다. 오히려 이병헌이 영어 연기를 훨씬 잘하는 듯. 제발 한국 드라마에서도 미드 같은 긴장감 넘치는 영어 신을 봤으면 좋겠다.
<사이비적 기독교>
기독교 비판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사이비 틱 하게 표현한 것이 아쉬웠다. 자세한 내용은 https://brunch.co.kr/@hihogyu/50 에 (기독교 메시지에 대해선 할 말이 많아 따로 정리했다)
6. 궁금했던 점
<왜 추억 소환 게임인가?>
드라마를 보는 내내 왜 하필 게임들이 소위 추억 속의 게임들이지?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이 궁금증은 맨 마지막 화에 가서 풀렸다. 할아버지 추억 소환 게임이었던 것으로.
<진행자들의 정체는?>
풀리지 않은 궁금증들도 있다. '병졸'이라 불리는 마스크를 쓴 진행자들은 어쩌다가 외딴섬까지 와서 이런 일을 진행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특히 졸병인 것 같은 ○ 마스크 진행자의 숙소는 거의 독방 수준이던데, 뭔가 약점 잡힌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드라마에서 나온 힌트를 종합해 보면 젊은 사람들이 꽤 있으며 (준호가 배에서 죽인 ○ , 프론트맨한테 헤드샷 당한 □) 나이 있는 사람도 있다(의사와 공모한 △). 뭔가 이들이 이곳에서 군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비하인드가 있을 것 같다.
<누가, 왜, 이런 게임을 시작했나?>
준호가 발견한 우승자 명단을 보면 이 게임은 1988년부터 시작한 유서 깊은 게임이다. 매년 455명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이 게임을 누가, 왜, 시작했는지 이후 시즌에서 말해줄지가 궁금하다. 나라별로 이런 게임이 진행된다는 떡밥까지 던져진 것을 보니 생각보다 훨씬 큰 스케일의 게임인 것 같다. 영어 엑센트를 보아하니 최소 영국, 미국, 중국에서 게임을 진행 중인 듯.
<준호는 살아 있나?>
어깨에 총을 맞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준호. 죽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으면 뭐다? 시즌 2에서 화려하게 부활할 것 같다. 일회성 캐릭터로는 아깝다는 생각. 다시 살아서 형을 찾아와야 제맛이지 (말해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
7. 마치며
이 드라마 시청을 마친 다음 날 오징어 게임이 미국 1위를 했다. 그리고 이 후기를 마무리하는 오늘 영국 을 포함한 76개국에서 1위를 했다. 전 세계가 이 한국적 감성이 다분한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같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공감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처음에는 참가자들과 똑같이 일확천금에 눈이 돌아갔더라도 점점 말살되어가는 인간성을 보며 현실과 게임 속의 세계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공감했다고 생각한다.
대놓고 시즌 2를 예고했는데, 시즌 2에서는 과연 어떤 메시지를 던질지 기대가 되는 오징어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