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에 과몰입한 don't look up
크리스마스 날, 루하가 일찍 자는 효도를 했다. 기회다 싶어 넷플릭스 돈룩업(Don't look up)을 거실에서 혼자 조용히 시청했다. 결말이 어느 정도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재미와 의미 둘 다 잡은 여운 깊은 영화였다. 장르는 블랙코미디지만 팬데믹과 기후변화의 위기를 맞이한 이 시점에선 가히 다큐라고 해도 될 듯하다.
과학자의 입장에서 솔직히 통쾌한(?) 영화였다. 과학자들을 무시했던 트럼프 때문에 코로나로 미국이 이 지경이 된 현실을 적나라하게 풍자해 주어서 위로를 받았다고나 할까. 정치를 과학적으로 할 순 있어도 과학을 정치적으로 할 수 없는 이유를 여과 없이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 역을 했던 메릴 스트랩의 연기가 좀 과하게 바보 같은 컨셉이었어도 용서가 된다.
과학은 어떠한 신념이 아니라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대로 '읽어내는' 학문이다. 그래서 그 자체로도 왜곡의 여지가 매우 적다. 여기에다가 Peer review, 즉 동료 과학자들의 검증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분야이기 때문에 조작질은 금방 들통난다 (물론 과학계에도 정치질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과학적' 이란 말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꽤 신뢰받는 수식어다. 그래서일까, 모든 재난 영화는 과학자의 조언을 무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과학을 전공한 이후로부터 영화에 과학자가 등장하면 일단 그 캐릭터에 몰입하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코로나 상황에서 진짜 전문가인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듣기보단 정치성 뉴스와 소문에 휘둘리는 대중들을 보며 답답했던 마음이 이 영화에 더 몰입하게 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과학과 대중의 소통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과학자가 과학을 쉽게 풀어내는 것이 쉽지 않다. 왜? 과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다 보면 매사 '엄밀성'을 훈련받게 되는데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이 엄밀성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직관적으로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못 견뎌하는 과학자들이 많다 (하지만 난 대충 말하는 것을 좋아하..). 한 가지 더, 과학에서는 우리가 관찰한 부분만 해석하려고 하지 그 이상은 추론의 영역으로 큰 신뢰를 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중은 직관적이며 상대적으로 자극적인 추론의 영역에 끌리는 면이 있다. 이 간극을 정치인들이 잘 이용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초반에 맨디 박사(디카프리오 역)와 디비아스키(제니퍼 로렌스 역)가 백악관에서 대통령에게 사안의 심각성을 이야기할 때 이 두 과학자의 성향 차이가 잘 드러난다. 맨디 박사는 교수답게 엄밀하게 풀어내 갑분싸를 자초하지만 디비아스키는 일상의 언어로 ‘이러다 다 죽어’를 잘 풀어낸다.
재밌다고 생각했던 건 이 두 사람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었다. 미디어에 노출되었을 때 엄밀하신 맨디 박사는 떡상하는 반면 직설적인 디비아스키는 밈화 되어 풍자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대중이 머릿속에 그리는 '과묵한 과학자'의 이미지가 맨디 박사에 더 부합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인 것 같고, 불편한 진실은 애써 외면하는 인간 본성이 두 번째 이유인 것 같다. 아 물론 진행자의 태도도 한몫했다.
과학적 사실을 대중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가, 특히 그 사실이 불편한 것일 때에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 생각하게 했던 부분이다. 논문에서는 얼마든지 과학의 언어가 통용되지만 대중과 소통할 때는 대중의 언어에 더해 대중의 심리, 그리고 미디어를 적당히 잘 이용하는 기술이 필요함을 느낀다.
정치인은 사회의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역할을 맡는다. 사회에서는 수많은 이해충돌자들이 얽히고설켜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경우는 절대 없다. 어떤 결정을 하던 이익을 보는 사람과 손해를 보는 사람이 생긴다. 하지만 누군가는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그 결정권을 정치인에게 위임한 것이다. 사적 이익이 아닌 공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고 판단하리란 기대하에.
맨디 박사와 디비아스키가 처음부터 뉴스 카메라 앞에 선 건 아니었다. 정부기관에 이 긴급상황을 타진하고 심지어 대통령에게 직접 이 사안을 브리핑했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여느 지구 멸망 음모론과 동급으로 취급한다 (여기서 깨알 같은 학벌주의 디스 장면은 덤). 국가의 공익을 생각했다면 음모론이라고 생각될지어도 주장하는 데이터가 있는 한 그것을 검증해보는 시도가 필요할 텐데 중간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즉 자신의 사적 이익에 따라 대통령은 이 두 과학자를 무시해 버린다.
여기까지는 뭐 정치가 과학을 무시하는 게 하루 이틀인가 했지만 소름이 돋았던 부분은 정치와 엮인 어용 과학자들을 동원해 과학을 (비)과학으로 찍어내는 장면이었다. 영화 내에선 NASA 국장과 아이비리그 교수들이 이 역할을 한다.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과학자를 찾는 정치인들이나, 정치인들이 원하는 말만 해주는 과학자들이 짬짜미 해 먹는 역사가 우리 정치사에도 꽤 있기 때문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장면이었다(사대강).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정치에서 과학의 비중은 언제나 미미했다. 다른 커다란 담론들에 밀려 늘 뒷전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전 세계가 과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과학 기술이 곧 안보이며 미래라는 것을 깨달은 이상 과학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점점 커져갈 것 같다. 과학자들이 이때까지는 끼리끼리 머물러 있었다면 이제는 정치와 사회 이슈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특유의 과학적 예리함으로 정치와 사회에 영향을 끼칠 때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연구에 몰입해야 하는 과학 분야 특성상 그런 여유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보통 미디어라고 하면 거대 방송사를 떠올리는데 요즘 세상은 유튜브를 비롯한 SNS들이 어쩌면 더 큰 영향력을 지닌 미디어가 됐다. 유튜브나 SNS에서 이슈가 되는 뉴스들이 방송국으로 역수입되는 현상이 이젠 낯설지가 않다. 옛날에는 9시 뉴스와 조간신문이 여론을 이끌었다면 이제는 포탈과 커뮤니티를 통해 최신 뉴스가 실시간으로 유통된다. 하루아침에 스타가 탄생하기도 하고, 죽일 놈이 되기도 하다.
문제가 있다면 이 빠른 뉴스의 전파속도만큼 검증이 따라가질 못한다는 것이다.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휘둘린다. 뉴스로 휘둘리고, 뉴스에 달린 댓글에 휘둘리고 진실은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영화에서 이 SNS의 가벼움에 대해 여러 번 풍자했다. 지구를 멸망시킬 혜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디아브스키를 밈화 시키고, 혜성이 밤하늘에 보일 정도로 가까이 접근했음에도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 못한채 'Look up' 이라는 유행어에 무지성 탑승한다. 또 정치인들은 이에 대항에 Don't look up 드라이브를 걸어 정치적 이슈로 변질시키고, 이 틈새를 이용해 어떤 배우는 둘다 나쁘다며 기승전영화홍보의 기회로 삼는다 (선글라스 껴서 모르는 사람이 많던데 이 배우가 크리스 에반스다). 이 혼돈의 카오스 속에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사라진다.
과학이, 정확히 말하면 과학적 사고가 이러한 현상에 해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합리적이며 검증 가능한지를 지겹도록 따지는 이 과학적 사고 말이다. 논문을 낼 때 데이터를 하이에나 물어뜯듯 검증하는 동료 과학인들의 그 까칠함엄밀함이 오늘의 이 혼란한 데이터 홍수에서 방향을 잡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종교하고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맨디 박사가 최후를 앞두고 가족들과 모여 기도를 한다.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이 시점에 무엇인가 의미 있는 행위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니면 죽음과 가까워지자 인간 안의 어떤 내재된 본능이 꿈틀 했는지도.
많은 과학자들이 종교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는 아마도 신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종교는 과학적 탐구 범위를 벗어난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에 과학자가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과학자가 종교를 가지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과학만능주의에 빠져있을 확률이 높다.
영화에서 감독이 막판에 기도하는 장면을 넣은 것이 좀 뜬금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종말이 진행 중인 지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지구에 있는 수많은 생명체들 중에 '신'이라는 개념을 가진 개체가 인간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도 하다. 또 죽음 앞에 겸손한 유한한 인생이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지각이 있는 개체이기도 하다. 일부는 지구 탈출에 성공하지만 죽음을 연기시킬 뿐이다.
We really did have everything, didn't we?
충격파가 들이닥치기 직전 온 거실이 흔들리는 가운데 나온 맨디 박사의 이 대사가 영화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미 필요한 것을 다 가졌는데 더 가지려는 인간의 욕심, 그리고 그로 인한 인류의 파멸을 한 줄로 깔끔하게 정리한 대사다. 영화를 보신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겠지만 강한 여운을 남기는 대사다.
영화에서 약 6개월 후 충돌하는 혜성은 현실에서 임박한 기후 위기를 뜻한다 (감독 피셜). 이미 충분히 가지고 또 누리고 있지만 더 많이, 더 풍족하게 누리려는 인간의 욕심이 영화처럼 인류의 멸망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전 세계가 뒤늦게 부랴부랴 탄소 중립을 외치는 이 시기에 모두가 한 마음으로 look up 했으면 좋겠다.
나아가 don't look up 이라고 외치는 무리들을 설득하고 불가피하다면 정면 승부를 벌여야 할 수도 있다. 기후 위기는 이제 추상적인 담론이 아닌 생존의 문제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