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신앙일기

큐티(QT)의 한계점

하나님의 음성인가 내 음성인가

by 선샤인

제목이 다소 도발적이다. 하지만 처음에 ‘큐티가 필요한가?’로 썼다가 '한계점'으로 수위를 낮췄다. 어찌 됐건 큐티 형식으로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존재하긴 하니까. 그럼 난 왜 이렇게 삐뚤어진 글을 쓰는가.


가장 큰 이유는 어느 교회를 가도 큐티를 강조하고 큐티 나눔을 많이 하는데, 정작 이 큐티가 얼마나 위험(?)한 지 가르치는 교회는 한 곳도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큐티에서 받은 은혜 나눔, 기도응답을 나누며 큐티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선전하기에 바빴다. 그래서, 그렇게 큐티를 열심히들 해서 무엇을 이루었나. 우리 가정에, 우리 직장에, 우리 사회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는가? 아니면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따라가는 것만 같아 마음이 뿌듯하고 기쁜 것에서 끝이 나는가?


QT, Quiet Time의 약자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고요한 시간이란 뜻이다. 수많은 목소리들이 요동치는 세상에서 잠시 눈을 돌려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조용히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자는 것이 큐티의 본 취지이다. 이러한 시간이 필요한가? 당연히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교제의 갈급함이 없다면 신앙생활 어딘가에 빨간불이 들어온 것이니 점검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큐티는 초신자들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말씀 자체가 낯선 이들에게 매일 묵상을 하는 습관을 들이며 세상으로만 향해 있는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는데 기여하는 바가 있다. 큐티하면서 받았던 은혜를 나누며 모임이 더 풍성해질 수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임을 본다. 벅찬 가슴, 풍성한 모임, 그 이후가 없다. 너무 시니컬한가? 큐티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한국 교회는 사회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가? 왜 다들 교회를 혐오하는가?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리고 난 그 문제점들 중의 하나를 자기중심적인 말씀묵상, 즉 큐티로 본다. 설사 큐티로 은혜를 받았다 한들 그 은혜가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 듣기 좋은 구호가 되었다가 사라진다. 능력이 없다. 오히려 자기 의만 쌓여간다.


이 글은 교회생활을 하려면 큐티는 같이 해야겠는데, 큐티의 문제점들 때문에 딜레마를 겪고 있는 한 사람의 글이다. 큐티로 많은 은혜를 누리고 있는 분은 시험에 들 수 있으니 패스하시길. 후에 내가 큐티를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 때 다시 읽어보시길 권하는 바이다.




자, 이 근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해 보자:


'왜 큐티를 하는가?'


이 질문을 하면 통상 돌아오는 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들에 답을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어떻게 확신하는가?(내 생각일 수도 있지 않나?)


위의 질문들에 파생하여 생기는 큐티의 문제점들이 있다. 생각을 정리하며 쓰는 글이라 생각나는 문제점들에 번호를 붙여본다. (이거 점점 길어지네..)


문제점 1: '내가' 하는 큐티

문제점 2: 한정된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려는 시도

문제점 3: 하나님의 뜻을 찾는 시도가 지나치게 주관적일 때

문제점 4: 적용점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감

문제점 5: 누적되는 나의 의


궁금한 번호만 보셔도 무방할 듯하다. 일단 하나씩 살펴보자.


문제점 1: '내가' 하는 큐티


'왜 큐티책에 지정된 본문으로만 큐티를 하지? 상업적으로 파는 큐티책일 뿐인데? 큐티책 회사의 사람들이 어떤 감명을 받고 본문을 정했을 리도 없고?' 대학생 때부터 했던 생각이다. 그래도 다들 하니까 같이 묵상하고 나눔 하고 했었다. 감사하게도 큐티책에서 임의로 지정한 큐티 본문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날들의 본문은 나에게 개인적으로 하시는듯한 말씀들이 많았다. 교회 차원에서도 큐티를 통해 마음을 모아 나아갈 방향을 잡아가는 순기능도 있었다.


그럼 된 것 아닌가?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자, 그럼 여기서 성경을 코란으로 대체해 보자. 코란이라는 것을 숨기고 오늘의 본문이라고 제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비슷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읽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나? 나도 그렇지 않길 바라지만 높은 확률로 사람들은 은혜를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낼 것이다. 왜? 큐티의 주체가 '나' 이기 때문이다. '내가' 본문을 묵상하고 해석하기 때문에 성경이던 코란이던 나의 경험과 지식을 불러오는 촉진제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럼 주체가 '나'가 아닌 '하나님'이면 괜찮은가? 그렇다. 큐티의 본 목적이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는 것' 아닌가? 물론 현실적으로 유체이탈하지 않는 이상 '나'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자기 생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는가?

이 질문에 대해 '오직 말씀으로'라고 대답한다면 다음 문제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문제점 2: 한정된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려는 시도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정된'이란 것이다. 즉, 이 본문 안에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고야 말겠어!라는 태도를 말한다. 안타깝게도 잘못된 접근이다. 만약 옳은 접근이라면 두세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반드시 그 뜻을 찾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도, 기도를 통해서도, 찬양을 통해서도, 자연을 통해서도, 뉴스를 통해서도,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그 뜻을 전하신다. 그런데 그런 다채로운 하나님의 음성을 큐티 본문, 그것도 오늘 본문을 통해서만 찾아내려 한다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제한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다. 큐티는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는 용도로 사용하되, 내 모든 환경에 귀를 열어놓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정리하고 싶다.


난 매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라고 반문하는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다: 정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거나, 아니면 내 생각이 하나님 생각이라고 착각한 경우다 - 바로 다음 문제점이다.



문제점 3: 하나님의 뜻을 찾는 시도가 지나치게 주관적일 때


'지나치게'라고 강조를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시도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략의 가이드라인은 있을지라도 객관화된, 어떤 정형화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법 1,2,3단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각 사람의 처한 상황이 다르고, 그 사람이 경험한 세월은 더욱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어떤 메시지를 주실지는 그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하지만 이 주관적이라는 것이 양날의 검인게 '내 생각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착각할 여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 착각 속에 산다. 목사도 장로도 선교사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신앙적으로 바로 섰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이 함정에 더 취약하다.


예를 들어 보면, 보편적인 큐티 방법은 보통 다음과 같은 관찰-해석-적용 순서다:

관찰) 본문을 반복해서 읽고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 (예: 예수님이 안식일날 제자들이 밀 이삭 잘라먹는 걸로 태클 거는 바리새인과 한판 뜨셨구나)

해석) 본문에 담긴 메시지가 무엇인지 해석한다 (예: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 고로 예수님은 하나님)

적용) 메시지를 오늘의 나에게 적용해 본다 (예: 주일의 의미를 소중히 여기고 참된 안식을 누리자)


언듯 보기에 무난한 큐티다. 결론적으로 이 큐티를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은 '주일의 의미를 소중히 여기고 참된 안식을 누려라'이다. 정말 그럴까.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명확할 때도 있지만 도리어 질문을 던지실 때가 더 많다: 안식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참된 안식은 뭐고? 안식일이 주일이라고 생각하니? 안식의 목적은 쉼인데 넌 잘 쉬고 있니? 진정한 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등등. 이런 질문들을 가지고 씨름하다 보면 답이 나오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핵심은 하나님과 이런 교제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오늘 큐티의 결론을 내야 하는 강박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다음 문제 포인트다.



문제점 4: 적용점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감


한마디로 성경을 '교훈집'으로 격하시키는 행위다. 성경의 장르가 얼마나 다양하고 그에 따른 메시지도 너무나 다양한데 그 메시지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나에게 적용점으로 다가온다면 그것도 문제다. 그냥 두리뭉실하게 적용점을 적었거나 아니면 내 생각에 성경을 인용했을 뿐이다.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매일 말씀하신다고? 그럼 다행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다음 문제점, 어쩌면 가장 큰 문제점을 안고 있을 확률이 높다.



문제점 5: 누적되는 나의 의


새벽기도 매일 나가는 권사님이 제일 무섭다는 말이 있다. 새벽을 깨우는 용사의 정체성을 가지고 새벽기도 안 나가는 사람들을 판단/정죄한다는 것을 농담처럼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블랙코미디인 게, 소위 교회에서 한가닥 한다는 사람들은 백 프로 이 문제를 안고 있다. 99프로도 아닌 백프로다. 누적되는 나의 의를 정기적으로 털어 버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새벽기도를 예로 들었지만 큐티도 그 범주에 드는 행위다. 큐티를 매일 할 때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느낌에 기쁘기도 하고 나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고 그렇다. 혹 그날 본문이 나의 가슴을 찔러 회개하고 새로워진 날은 더욱 그렇다. 그렇게 '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 혹은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의가 조금씩 쌓여 간다. 그러한 자기 의는 큐티를 빼먹은 날엔 자기 정죄감으로 찾아오고, 큐티를 안 하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는 믿음 없는 자들이라는 판단으로 나타난다. 혹 매일 큐티를 한 사람을 만나면 큐티책에 얼마나 묵상을 많이 적었나를 슬쩍 보고 양이 적으면 큐티 대충 했다는 판단을 내린다.


나의 의가 누적되는 건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끊임없이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를 덧입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진짜 큐티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어쩌라는 건가? 큐티를 하지 말라는 건가? 그렇다. 레디컬한 발상일 수 있겠지만 관성적으로 하던 모든 것을 멈춰보는 것을 제안한다. 큐티도 멈추고, 기도도 멈추고, 예배도, 봉사도 멈춰보는 것이다. 그럴 때 진짜 내 신앙이 나온다. 멈춘다고 신앙심이 없어진다면 그게 내 수준인 것이다. 모든 것을 멈췄어도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남아 있다면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하나씩 재정비하면 된다. 개인적으로 모든 것을 멈췄을 때 진짜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이 됐다.


큐티를 하고 말고는 본인의 선택이다. 큐티를 하면서 하나님과의 고요한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큐티를 안 하고도 얼마든지 다른 형식으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다. 기도의 시간이 될 수도 있고, 회사 점심 후 잠시 멍 때리며 조용히 있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출퇴근 지하철, 혹은 운전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형식 자체가 아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다. 그리고 그 관계가 충만하다는 것은 가족과 이웃사랑, 나아가 지역사회를 사랑하는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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