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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 Feb 08. 2020

상사의 한 마디에 '아차' 싶었다

어리석고 순진한 사회초년생의 실수

어리석고 순진한 사회 초년생의 한 마디가 모든 일을 그르쳤다. 나의 의도의 정반대로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흘렀다.

내가 한 외주제작사에서 막내작가로 일하던 시절, 함께 막내작가로 일하던 ㄱ씨가 고참 PD ㄴ씨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누군가 성추행당했다는데... 그게 너니?") https://brunch.co.kr/@hiijy/30​ 이는 공론화됐고 대표와 팀장 등이 막내작가들을 불러놓고 ㄴ씨의 거취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를 열었다. 말하자면 ㄴ씨의 징계위원회를 연 셈이었다.

팀장은 막내작가들을 불러놓고 이야기했다.

“ㄴ씨를 어떻게 하면 좋겠니? 잘 생각해야 해. 이건 한 사람이 아니라 ㄴ씨의 가족 모두의 문제야. ㄴ씨의 아이들까지 생계를 책임져온 사람이니까.”

적막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ㄱ씨도 입을 열지 않았고 막내작가들 중 가장 선임이었던 ㄷ씨도 침묵했다.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나도 그때 그랬어야 했다.

나의 고질병은 침묵을 못 견디는 것. 무슨 말이라도 해서 침묵을 깨는 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ㄴ씨는 저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명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채우지 못한 명예욕을 ㄱ씨를 통해 얻고자 하신 것 같은데... ㄴ씨가 소중히 생각하는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보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회사에 계속 나오기도 민망하실 테니.... 능력 있으신 분이시니 어디서나 일하실 수 있겠죠. “

그러자 팀장의 눈이 커졌다.
“그래, ㄴ씨의 명예를 생각해야지. 그렇게 해. ㄴ씨에게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줘보자.”
팀장은 다른 막내작가들을 바라보며 “너네는 왜 이런 생각을 못했니?”라고도 말했다.
팀장과 대표는 ㄴ씨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고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하자고 결정했다.
이의 없냐는 말에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패닉이었다.

나는 닥치고 있어야 했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순간부터 나는 뻔뻔해졌다. 그렇지 않으면 퇴사해야 했는데 그때 퇴사할 수가 없었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

변명을 하자면 성추행 사건이 터지고 여러 날이 흐른 뒤 불시에 막내작가들을 부른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징계위원회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할 겨를이 없었다.

비겁한 변명일 뿐이지만 그 말을 하고 10여 년이 지나도록 나는 계속해서 후회하고 있다. 죄책감 속에서도 나를 다잡기 위해 옹색하나마 스스로에게 변명을 늘어놓았고 그래서 그 뒤로도 ㄱ씨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ㄱ씨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했고 ㄴ씨도 업무에 복귀했다.

몇 달 뒤 나는 퇴사하기로 했다. 말실수 사건뿐 아니라 다음 글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다양한 사건들이 그곳에 있었다. 퇴사하기로 결정한 다음 나의 마지막을 막내작가들이 배웅해줬다. ㄱ씨는 내 짐이 너무 무겁다며 혼자 갈 수 있겠냐고 걱정해주기도 했다.

퇴사 뒤 우리는 찜질방에서 모였다. 곱창을 먹고 찜질방에서 미역국을 먹었다. 땀을 빼면서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눴다. 회사는 아직도 그대로인지, 앞으로 계획은 뭔지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밤이 깊을수록 정신은 몽롱해졌고 나는 그만 속마음을 ㄱ씨에게 털어놔버렸다.

그저 사과를 하고만 싶은 마음에,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ㄱ씨, 내가 그때 너무나 경솔하게 말했어요...ㄴ씨 문제를 두고 먼저 말해버려서 미안해요. 진짜 그렇게 될 줄 몰랐어요. 도우려고 그랬던 건데... 정말 미안해요.”

ㄱ씨는 나의 말을 듣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한 건 처음이네요.” 그 말을 끝으로 ㄱ씨와 나는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어떻게든 되갚을 수 있다면 갚아주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럴 수 없다. 실수를 뼈아프게 반성하는 것으로,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속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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