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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ISU Apr 03. 2020

주방세제 한잔 하고,
클렌징 폼으로 이를 닦았다고요?

소비자 인식이 정하는 제품의 쓰임

영업팀장님들과 장시간 회의를 하고 나니 소위 기가 빨려 아침부터 허기가 졌다.

신규 출시한 세탁세제가 안 팔리는 101가지 이유를 듣고 나니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파왔다.

마케팅으로 보직 이동한 지 얼마 안 된 나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신제품이 안 팔린다는 영업과 영업이 잘 못 팔고 있다고 주장하는 마케팅의 치열한 혈전 속에서 난 그래도 무사히 살아 나온 게 다행이었다.

무려 3시간여 동안 화장실도 못 가고 좁은 영업 회의실에 붙잡혀 시커먼 아저씨들에게(그 당시 나에겐 영업 팀장님들이 그렇게 보였다. 나중엔 친해져서 어깨동무하고 술도 자주 마시고 그랬지만 말이다.) 신제품의 유통전략이 뭔지, 가격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지, 행사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지, 끝도 없는 질문을 받아 초췌해진 상태였고, 회의가 끝나 자리로 돌아온 나는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앞에는 팀장들 몇몇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며칠 전 술에 취한 할아버지 한 분이 주방세제를 몸에 좋은 한방즙 정도로 생각하고 마셔서 응급실로 실려 가셨다는 기사가 났단다. 그 당시 주방세제 제품들이 천연성분이 함유된 작은 사이즈의 파우치 제품들이 나오고 있어서 아마도 술에 취해 눈도 가물가물해서 글자도 잘 안보이고, 술기운에 맛이 이상한 것도 느끼지 못한 채 할아버지는 원 샷을 하셨고, 위세척까지 하고나서야 정신을 차리셨다는 이야기였고, 그 제품은 판매가 중지 되었단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액체세제를 개발하고 있는 나로서는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이 사건에 비하면 영업이 말하는 제품이 팔리지 않는 101가지 이유는 애교수준이었다.

더러운 빨래를 깨끗하게 빨기 위해서 개발된 세탁세제가 우리 몸에 좋을 리 없고, 제품을 개발하고 있는 나조차도 세제가 손에 묻기만 해도 가능한 빨리 닦거나 씻어내고 있는 상황에서 세제를 마실 수도 있다는 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더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어이없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제품 오인지로 인해 일어나는 사고가 의외로 많다.

이 기사 때문에 사장님께서는 디자인 보고를 받으실 때마다 제품이 오인지 되지 않도록 디자인하라는 말씀을 강조하셨고, 평상시에는 제품 전면에 쓰지 않던 ‘먹지마세요’라는 문구를 전면에 잘 보이게 넣으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 보호포장에 대해서도 적용범위를 넓히고, 재검토를 해야만 했다.

실제로 미국 독극물통제센터협회(AAPCC)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2017년 5세 미만의 아이들이 실수로 캡슐형 세탁세제를 사탕으로 생각하고 먹어서 난 사고가 총 1만 570건이나 접수됐다고 한다. (2018.2.28. 한국일보 ‘캡슐형 세제를 캔디로 알고 먹는 ‘유아 사고’ 빈발’ 기사 참고)     


내가 화장품 브랜드의 담당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을 때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클렌징폼 제품은 말랑말랑한 플라스틱 PE 재질의 튜브에 담겨 있는데, 일부 제품은 알루미늄 튜브에 들어있는 경우가 간혹 있다.

아내가 세면대위에 놓아둔 알루미늄 튜브에 들어있는 클렌징 폼으로 남편이 이빨을 닦는 경우가 종종 발생해서 알루미늄 재질의 튜브를 화장품 패키지로 사용할 때에는 주의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아마도 남편은 치약제품에서 흔히 사용되는 알루미늄 튜브에 담긴 제품이니 무의식중에 당연히 치약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이 제품이 어떤 제품인지, 어디에 사용하는 제품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의외로 제품에 쓰여진 글자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소비자들의 오랜 경험과 지식이 만들어놓은 무의식속에는 그들만이 기억하는 인식의 기준들이 있고, 그것을 근거로 제품에 쓰인 글자와는 전혀 다른 판단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위험을 경험한 적이 없고, 술에 취하면 판단이 흐려지기도 하고, 이른 아침에는 마음이 급해서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하지만, 이런 판단이 과연 그들만의 잘못일까?

제품의 용도를 직관적으로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 역시 패키지디자인의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다.

상황에 따라서는 추가 비용이 발생하더라도 패키지에 이중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아무리 피부에 양보하라고 해도 아이들은 탱글탱글한 젤리 타입의 화장품을 맛보고 싶어 하고, 늘 우유가 담겨있던 종이 카턴 팩에 담긴 섬유유연제는 무의식중에 입으로 가져가게 마련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차별화라는 명분을 들이대도 소비자들의 인식에 대한 제품개발자들의 지나친 도전은 금물이다.

제품을 팔고 싶어 하는 마케터나차별화된 제품을 만들고 싶은 디자이너의 눈이 아닌글자를 잘 읽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눈높이로 내가 만든 제품을 한번 바라보자

내 제품은 뭘로 보이는가?

혹시 맛있는 라떼처럼 보이는 섬유유연제나 달콤한 젤리처럼 보이는 세제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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