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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ISU Apr 19. 2020

저는 말로 하는 디자이너 입니다만,

그렇지만 여전히 입보다 빠른 손

몇 년 전 회의시간에 영업 상무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영업은 대부분 일하면서 배우기 때문에 신입사원들은 실수를 할 수가 있으니 너그럽게 이해해 달라는 말씀이셨다.

영업이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학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꿈이 영업이었던 직원보다는 어찌어찌하다 보니 영업사원이 된 경우가 많아 처음 배우는 몇 년간은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거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었다. 

영업은 왜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걸까?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경영학과를 졸업한 학생들은 대부분 마케팅으로 입사를 해서 사업계획을 세우고 마케팅 전략을 짜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지, 현장에서 발로 뛰면서 영업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과 입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나눠져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다들 몸으로 하는 것보다는 말로 하는 걸 더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일단 몸으로 하는 일은 말로만 하는 것보다 힘이 든다. 대부분 가방끈이 길거나 경력이 많은 사람들이 말로 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월급도 차이가 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말 한마디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일이 근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독 디자이너들은 좀 다르다.

끝까지 몸으로 일하는 걸 고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디자인을 잘한다고 인정받았던 사람들의 경우가 더 그렇다.

심지어 자신들한테 디자인을 못하게 하고 말만 시킨다고 회사를 나와 따로 디자인사무실을 차리기까지 하니 디자이너도 참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나의 디자인 멘토였던 모 교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다.

디자이너의 창의력은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연륜과 함께 커가기 때문에 죽기 직전에 하는 마지막 디자인이 최고의 디자인이라고 말이다. 

자신도 죽기 전까지 디자인을 계속하고 싶다고도 하셨다.

물론, 그분은 지금 디자인을 하지 않고 계신다. 생각과 실천은 또 다른 문제인가 보다.     

나도 십 수 년 디자인에 빠져 몸으로만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말로 디자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몸으로만 일을 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청산유수처럼 말을 잘 할리가 없다.

그리고 디자인이라는 게 참 특이하게도 내가 계획했던 시안보다 우연히 끄적거리다 만들어진 시안이 더 좋을 때도 있고, 갑자기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니 직접 해보지 않고 말로만 하는 게 한계가 있는 거다.

처음 디자인을 배울 때 나를 가르쳐주셨던 팀장님은 가끔 내 자리에 오셔서 조언을 해주곤 하셨는데, 말로 설명이 여의치 않으실 때는 양해를 구하고 내 자리에서 직접 디자인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하셨다. 

신입사원이었던 나에게 팀장님이 디자인하시는 모습을 보는 건 많은 공부가 됐었던 기억이 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때 쓰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기도 힘들다.

그런 가르침을 요즘 디자이너들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신입사원들조차도 자신들이 이미 어엿한 디자이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팀장님이 나를 무시한다, 자존심 상한다, 내지는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로 해서 몇 시간 동안 끙끙 앓느니 몇 분 투자해서 답을 알려주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 난 가끔 그 방법을 쓰곤 했다.

그만큼 말로 디자인을 가르치는 건 어렵다.

물론, 잘 알아듣고 몇 마디 말에도 디자인을 척척 해오는 디자이너들도 있지만 그건 내가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잘하는 디자이너인 거다.     

말로 하는 디자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디자이너도 영업이란 걸해야 한다. 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는 영업이 영업부서에만 있는 업무가 아니다.

디자이너도 내부고객들에게 영업을 해야 한다.

아무리 유명한 명화라도 설명 없이 보면 감동이 덜하듯이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그럴듯한 콘셉트 설명과 함께 디자인을 보여줘야 감동을 줄 수가 있다.

처음 보여줄 때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다양한 프레젠테이션 방법을 연구하기도 하지만, 난 그렇게 까지 하지는 않았다.

시안 설명을 다 들은 후 나오는 첫마디가 항상 중요하다.

"와~, 역시!"로 시작하면 게임 끝이고, "글쎄~, 좀~"으로 시작하면 일이 꼬일 확률이 높다.

이 시안 저 시안을 마구 섞어서,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다 식어서 먹고 싶지 않은 미지근한 커피를 만들어버리기 일쑤다. 

그러면 그 디자인은 처음부터 또다시 시작이다.     

영업사원이 꿈이 아니었던 그들처럼 나도 말로 하는 디자이너가 꿈은 아니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말로 하는 디자이너가 되었을 뿐.

그리고 아무도 나에게 말로 하는 디자인은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준 적도 없다.

그냥 한해, 두해 시행착오를 하며, 시간이 지나니 경력이 쌓여 점점 익숙해져 갈 뿐이다.

어떤 분야든 실무자에서 관리자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내 말 한마디면 직원들이 척척 알아서 일을 해줄 것 같지만관리자가 하나하나 세심하게 신경 쓰지 않으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사고가 나고가끔은 내가 했다고 말하기 부끄러운 수준의 결과물을 만들기도 한다.

차라리 내 손으로 직접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누구나 겪는 관리자가 되는 과정일 뿐이다.     

덴마크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들을 보니 그들은 아무리 직급이 올라가도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와는 업무시스템이 다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한 책임은 디자이너 스스로가 진다. 팀장은 단순히 조언을 해주고 방향에 대한 상의만 해줄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나처럼 말로만 하는 디자이너는 얼마나 이상해 보일까?

우리나라에는 몸으로 일하는 사람보다 말로만 먹고사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일까?

디자이너는 경력이 쌓여가면서 관리자가 되는 길과 스페셜리스트로 남는 두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이 순간에 중요한 건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다

나는 어떤 디자이너로 남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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