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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ISU Apr 20. 2020

디자이너가 마케터로 산다는 건

처음 살아보는 마케터의 삶

어느 날 상무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내가 과장 때였는데 상무님께서는 사무실 테라스에 있는 화분들에 물을 주고 계셨다.

10여개의 화분들이 추운 날씨를 피해 디자인팀 테라스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아침마다 물을 주는 건 상무님께서 늘 하시는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긴장감이 풀리는 듯했다. 그날따라 날씨도 좋았다.

상무님께서는 나를 한번 흘끗 보시더니 가볍게 미소를 지으셨다.

그리고는 하던 일을 계속하시면서 넌지시 물으셨다.

"장 과장, 마케팅 업무 한번 해볼래?"

앞뒤 설명도 없이 쿨 하게 물으셨고, 난 또 쿨 하게 대답했다.

"그럴까요? 좋죠."

왜 그랬을까?

하지만, 그 한마디가 가져올 내 삶의 후폭풍을 미리 알고 있었어도 아마 난 같은 대답을 했을 것 같다.

MBA 수업도 들었었고, 브랜드에 관심도 많았기 때문에 실제로 마케팅 업무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만 있던 생각이 불쑥 말로 튀어나와 나도 깜짝 놀랐다.

내 대답을 들으신 상무님께서는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셨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고 표정관리를 하셨지만 난 느낄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내 대답이 상무님께서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음을...     

그 일이 있은 후 인사팀장님과 사장님까지 만났고, 디자이너가 마케팅으로 가는 전무후무한 나의 마케팅 행은 확정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사장님께서는 내가 너무 걱정할까 봐 감사하게도 이런 말씀까지 해주셨다.

몇 년 만 마케팅 업무를 해보고 정말 못해먹겠다 싶으면 다시 디자인팀으로 보내주겠다는 말씀이셨다.

하지만, 나는 안다. 회사에서 개인의 미래는 아무도 약속할 수 없다는 것을. 몇 년 후가 아니라 며칠 후의 가까운 미래도 예측할 수 없는 게 회사생활이다.     

홍대에 위치한 디자인센터가 아닌 구로동에 있는 본사로 출근하는 첫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같은 회사지만 너무 낯선 환경이었다.

난 브랜드마케팅팀 세탁세제 파트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내 책상, 의자, 그리고 컴퓨터까지 모든 게 낯설었다.

심지어 나는 디자인팀에서 매킨토시로만 일을 했었는데 책상에는 일반 PC가 놓여있었다.

인사를 나누는 직원들도, 사무실 분위기도 디자인팀과는 너무나 다른 환경이어서 마치 다른 회사로 이직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게 나의 쌩초보 마케터 생활은 시작되었다.     

디자인팀과 마케팅팀의 업무는 많이 달랐다.

우선 매킨토시에서 주로 일러스트레이터나 포토샵으로 일을 하던 내가, 일반 PC의 엑셀과 파워포인트로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비주얼 자료와 상상력을 바탕으로 아이데이션을 위주로 하는 디자인 업무와는 달리 마케팅은 팩트를 근거로 한 논리와 숫자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게 무엇보다 어려웠다.

나를 정말로 힘들게 했던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회의였다.

디자인팀 업무는 잠깐의 아이디어 회의나 시안 회의가 끝나면 주로 개인적으로 디자인 작업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당연히 스케줄 관리도 혼자 알아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마케팅 업무는 회의를 통해서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

마케터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연구소에 제품의 내용물 개발을 의뢰하고, 디자인팀에 디자인을 요청하고, 구매팀에, 홍보팀에, 영업에, 고객만족팀까지 업무협조를 구하는 일, 그리고 임원 분들께 보고하는 모든 일이 회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사업체, 광고업체, 원료업체, 이벤트 업체들과 만나 회의를 하고 나면, 전국에 있는 매장들과 지점들을 돌아다녀야 했다.

칼 퇴근은 물론 주말에도 거의 쉬지 못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소비자 조사는 직장인들이 퇴근한 후에 이루어지고, 신제품 반응을 봐야 하는 마트에는 주로 손님들이 주말에 오고, 매장 이벤트도 손님이 많이 오는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에 시작하기 때문이다.

월요일 아침이 되면 임원 분들께서 꼭 주말 행사 매출과 소비자 반응을 물어보시기 때문에 반응을 모르고 있으면 난감한 일이 벌어진다.

나처럼 숫자 감각이 없고, 엉덩이가 무거운 디자이너가 하기에는 참 고단한 일이었고, 무엇보다 체력에 한계가 왔다. 어떤 날은 단 5분도 내 자리에 앉아 본 적이 없었다. 마케팅 용어도 익숙하지 않아 알아듣는 말보다 못 알아듣는 말이 더 많았다.     

그래도 그중 내가 재미있게 잘할 수 있었던 일은 마케팅 콘셉트를 잡고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신제품 개발 업무였다내가 못하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남들 수준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다그래서 잘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춰 더 열심히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그리고 내가 부족한 부분은 팀원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목표를 정하고 나니 여전히 힘들기는 했지만마음도 편해지고 일도 조금씩 재미있어졌다.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일과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정하고그 일을 다시 내가 꼭 해야 하는 일과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 있는 일로 나누었다그리고 내가 꼭 해야 하는 일 이외의 일들은 담당 BM에게 모든 권한을 주어 주도적으로 하게 했고보고도 사후보고로 받았다.

그렇게 만든 신제품으로 성과를 냈고난 공로상을 받으며 회사에서 인정도 받고부장으로 승진까지 했다.     

그렇지만, 난 마케터로 일하는 내내 나 자신에게 묻곤 했다.

내 남은 인생을 마케터로 살 수 있는지...

마케팅 업무도 처음에는 생소하고 어려웠지만, 하면 할수록 탐이 나는 재미있는 직업이었고, 제품이 팔려나가는 걸 보는 성취감도 컸다.

브랜드를 만들고 관리하는 일도 각기 다른 상황에 놓인 여러 브랜드를 관리하다보니 점점 익숙해지면서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내가 모르고 있던 나의 소질 같은 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다더 중요한 문제는 그 일을 잘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그 일을 정말 좋아할 수 있는가이다     

딸이 한국에 오더니 싫어하던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한다. 열심히 하니 성적이 올라가고, 성적이 올라가니 재미가 나는지 더 열심히 한다. 그렇지만 그림 그리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딸이 수학하고 관련된 직업을 가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무리 못하게 해도 딸은 숨어서 그림을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에 글을 쓴다. 말려서 될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좋아해서 아무도 못 말리는 그런 일.

디자이너를 천직으로 알던 나에게 마케팅이 그런 일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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