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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ISU Apr 22. 2020

디자이너가 인정받는 다양한 방법

내 상사만 날 평가하는 건 아니다

난 디자인 전문회사에서 5년 정도 일하다가 기업체에 경력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디자인 전문회사에서는 식품패키지를 주로 디자인했었는데, 회사를 옮기니 생활용품과 화장품 패키지를 디자인해야 했다. 같은 디자인 업무라도 품목이 바뀌니 적응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입으로 입사해서 이미 회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오래된 디자이너들과 비교하면 제품에 대한 이해나 유관부서와의 릴레이션쉽도 약해서 일하기가 더 어려웠다.

야근과 새벽 출근을 반복하며 그들과의 격차를 줄여가고는 있었지만 디자인팀 내에서 내 실력을 인정받을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업무도 익숙해질 즈음 낯선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영업사원이 보낸 메일이었는데, 아마도 사내 인트라넷에서 내 메일 주소를 찾아서 보낸 것 같았다.

디자이너가 영업사원에게 메일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체육대회에서 같은 팀이 됐을 경우에나 가능한 아주 드문 경우이다.

메일을 열어보니 나한테 보낸 메일이 맞기는 했다.

"디자이너님, 안녕하세요?....."로 시작하는 메일이 좀 우습기도 하고,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메일을 보낸 이유가 궁금하기도 해서 계속 읽어보기로 했다.     

나에게 메일을 보낸 영업사원은 대형 할인매장을 담당하는 영업사원이었다.

메일 내용은 구구절절했지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그 영업사원이 담당하는 할인매장 전용으로 디자인을 해준 제품을 디자이너가 직접 가서 브리핑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하던 일도 있고, 근무시간에 자리를 비우려면 팀장님께 허락도 받아야 하고, 암튼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부분의 제품은 영업사원들이 직접 제품에 대한 간단한 디자인설명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디자이너가 직접 가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생각하며 거절할 방법을 찾고 있는데, 그 영업사원에게 전화가 왔다.

메일 보낸 지 한 시간도 안돼서 전화까지 하는 걸로 봐서는 어지간히 똥줄이 타는 모양이었다.

영업사원이 안쓰러워 결국 브리핑을 하러 영업사원과 함께 매장을 방문했고, 이런 저런 질문들이 많아서 디자이너 관점에서 답변도 해주고 의견도 주게 되었다.

덕분에 디자인이 강한회사라는 점을 알리게 된 계기도 되면서 내가 조언해 준 의견들이 내부에 별도의 디자이너가 없었던 그들에게도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그 영업사원은 나에게 고맙다는 장문의 메일을 보내왔고 덕분에 나도 정확히 어떻게 도움이 된 건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내가 영업에 준 도움은 영업사원의 입에서 영업팀 상무님에게로, 다시 디자인팀 상무님과 사장님에게로 전해졌고, 난 별도의 포상까지 받았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팀장님은 물론, 상무님, 사장님까지 나에 대해 관심을 보이셨다.

물론 나에 대해 알게 된 영업사원들도 많아졌다.

알고 보니 나에게 메일을 보냈었던 영업사원이 꽤나 입담이 좋아서 내 얘기를 여기저기 어지간히 하고 다닌 모양이었다.

영업사원 입장에서도 자신이 회사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것처럼 디자이너를 대동해서 브리핑도 하게 되고 자신의 클라이언트에게 조언도 해주는 입장이 되니 얼마나 뿌듯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자주 영업을 도와줬고 영업을 잘 이해하는 디자이너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부분은 회사 내에서 나의 인지도가 생기면서 활동영역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내가 늘 이상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있었는데, 디자이너들이 회사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고, 매출이 좋은 브랜드를 디자인하고 싶어 하는 거였다.

아니, 판매가 잘 안되고, 인지도도 없는 브랜드를 맡아서 성과를 내야 진정한 자신의 성과가 되는 거지, 이미 잘 나가고 있는 브랜드를 아무리 잘 디자인한다고 해도 그게 나의 성과인지 브랜드 덕인지 명확하지가 않아 실력을 인정받기가 어려운거 아닌가? 하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그런 브랜드를 선호했다.

일등 브랜드를 담당한다는 것만으로도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비중 있는 브랜드는 회사에서 관심도 많고, 이직을 할 때도 유리하긴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난 여전히 디자인으로 매출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유명하지 않은 브랜드를 좋아했다.

그중 하나가 방향제 브랜드였는데 외국회사와 합작으로 만들어진 브랜드였고, 난 그 제품의 디자인으로 해외 본사로부터 표창장까지 받았다.

디자인팀 내에서는 아무도 관심 있게 보지 않았던 브랜드였지만, 난 그 브랜드를 담당하겠다고 했고, 좋은 디자인을 해줘서 고맙다고 해외 본사에서 보내온 표창장을 사장님께서 직접 나에게 주셨다.

그렇게 외부에서 성과를 인정받다 보니 팀장님도 상무님도 나의 성과를 가볍게 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해 연말 인사고과에서 난 최고의 점수를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런 일들은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있었고, 난 내 상사만 날 평가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활동영역이 넓어지고 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게 나에게 얼마나 자신감을 주는지도 알 수 있었다.


디자이너들은 가끔 우물 안 개구리처럼 그들만의 리그에 집착하다가 더 큰 것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다른 디자이너들보다 디자인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내가 디자인으로 회사에 이익을 주는가고객에게 내 디자인으로 제품을 선택하게 만들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디자인을 팀장님께 인정받는 것 못지않게 고객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디자인팀 내부에서 실력을 인정받을 기회를 잡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

이럴 땐 외부에서 먼저 인정받아서 내부에 전해지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디자이너는 많고, 팀장은 한 명이며, 회사는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아무리 능력 있는 팀장이라도, 아무리 직원들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회사라도 놓치는 게 있게 마련이다.

남들이 하는 디자인을 똑같이 하면서남들이 걸어온 길을 똑같이 걸으면서 실력을 인정받으려면 그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하고 그렇게 한다고 해도 성과를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남들과는 좀 다르게 걷고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고때로는 다른 디자이너들이 선호하지 않는 비중 없는 브랜드라도 최선을 다해 디자인해보자.

만일 그 브랜드가 성과를 낸다면 그건 온전히 디자이너의 공이고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해도 그건 브랜드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담 없이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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