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혼나는 날일까? 칭찬받는 날일까?
오랜만에 회의실에 같은 부문 직원들이 모두 모였다.
일 년에 한 번 부회장님께 년간 사업계획을 보고하는 날이라 마케팅, 디자인, 연구소, 영업, 구매팀 할 것 없이 모든 부서가 모였고, 사장님과 임원 분들까지 모두 회의실에 모여 있으니 회의실이 꽉 찼다.
각 부문의 팀장들은 프레젠테이션 준비로 분주했다.
나도 연초에 새롭게 출시할 제품의 디자인 전략을 보고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사실 마음은 편치 않았다.
올해 우리 부문의 매출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것도 몇 년째...
오늘따라 직원들은 또 왜 이리 많아 보이는지....
돈도 못 벌면서 자식들만 줄줄이 딸린 가난한 흥부처럼 부서마다 담당 직원들도 많아보였다.
올해는 어떻게든 제비 새끼의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뭔가 성과를 좀 내야 할 텐데... 윗분들을 뵐 면목이 없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발표를 앞둔 팀장들도 모두 표정관리는 하고 있었지만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워 보였다.
잠시 후 부회장님께서 들어오셨다. 역시 표정이 좋지 않으셨고, 회의실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부회장님께서는 회의실을 한번 쭈욱~ 둘러보시더니 회의를 재촉하셨다.
마케팅팀장이 첫 번째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작년에는 매출 바닥에, 손익도 바닥. 그렇지만 올해는..... 마케팅의 발표 자료가 첫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회의실에는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고, 가끔 천둥과 번개를 동반했다.
오랜 비바람에 눈 한번 제대로 뜨지 못하고 마케팅 팀장의 발표가 끝났고, 영업도 별수 없었다.
난 점점 멘붕이 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을 안 할 방법도 없었다.
평상시에도 말씀을 잘하시는 부회장님께서는 혼낼 때도 정말 논리 정연하셨다.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그냥 비바람 속에서 눈물을 감출뿐이다.
나의 잔뜩 얼어있는 표정을 읽으셨는지 부회장님께서는 발표 시작 전에 나에게 이런 농담을 하셨다.
"장 팀장 분위기가 이래서 어떻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준비한 대로 편하게 해."
위로인 듯 아닌 듯, 병 주고 약 주는 부회장님 멘트에 마음을 가다듬고 어찌어찌 발표를 마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회장님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밝게 웃으시면서 내 발표를 끝까지 들어주셨고, 격려의 말씀도 잊지 않고 해 주셨다.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프레젠테이션이 무사히 끝났으니 다행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일 년 후, 난 같은 발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과는 달리 모두들 마음의 여유가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재작년의 부실했던 실적을 깨끗이 벗고, 작년에 우리 부문은 사상 최대의 매출과 영업이익에 브랜드도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무서울 게 없었고 자신감도 넘쳤다.
우수한 품질에 만족도가 높은 디자인, 그리고 최적화된 제작원가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게 없었고, 모두들 칭찬받을 생각에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을 정도였다.
각 부서 직원들도 얼굴이 밝아 보였고, 한 명 한 명이 없어서는 안 될 고마운 존재들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회의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부회장님께서 들어오셨다. 예상대로 표정이 좋으셨고, 회의실은 편안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부회장님께서는 회의실을 한번 쭈욱~ 둘러보시고는 회의를 재촉하셨다.
사상 최대의 매출과 영업이익을 기록했다는 마케팅 팀장의 자신감 넘치는 성과를 중심으로 발표가 시작되었지만, 우리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고, 회의실은 또다시 몰아치는 비바람에 다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영업도 연구소도, 그리고 이번엔 내가 준비한 디자인 발표도 비바람을 피하긴 힘들었다.
그렇게 기대했던 칭찬 한마디 없이 회의가 끝나고 나니, 부회장님께 좀 서운하기도 하고, 왜 혼나야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나뿐만이 아니고 모두들 그런 서운한 눈치였다.
난 복잡한 마음으로 회의실 복도를 걸어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사장님을 만났다.
사장님께서는 뜻밖에도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장 팀장, 오늘 발표 좋았어. 부회장님 말씀은 신경 쓰지 마. 장 팀장이 발표를 못해서도 아니고, 미워서도 아니야, 물론 다른 팀장들도 마찬가지고. 그냥 일 년에 한 번씩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거야."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췄고, 사장님께서 나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해주시고 난후 나가셨고, 난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사장님의 말씀은, 직원들이 너무 긴장하고 있으면 오히려 칭찬을 해줘야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잘 나간다고 자만하고 있거나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면 긴장하라고 채찍질을 해야 하는 부회장님의 고유 권한이자 역할이라는 말씀이셨다.
부회장님께서는 이미 회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오늘 회의실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방향을 정하시는 거다.
그건 발표 내용과도 아무 관계가 없고, 이미 회사 전반에 대해 보고를 받으신 후 부회장님만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발표를 잘해도 그날 나는 혼날 운명이었던 거고, 그런 날은 그냥 혼나면 되는 거였다.
내가 왜 혼났는지, 내가 뭐가 부족한 건지, 계속 이 회사를 다녀야 하는 건지를 가지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자만하지 말고 조금 더 긴장하면 될 문제였다.
그리고 부회장님의 시나리오에는 내가 칭찬받는 날이 언제인지도 정해져있다.
나뿐 만이 아니다. 마케팅 팀장도, 연구소 팀장도, 영업 팀장도 칭찬받는 날이 있다.
그렇게 칭찬과 꾸지람을 반복하면서 직원들에게 적당한 긴장감과 일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경영자의 역할이다.
만일 내가 진짜로 일을 못해서 혼나야 할 경우에는 내가 아니라 우리 팀 상무님께서 대신 혼나신다.
그게 조직이고 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의 생리는 비단 경영진을 모시고 하는 팀장들의 회의에서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나 역시도 직원들의 디자인 시안을 보고받으면서 어떤 날은 웃으면서 시안을 수정시키고, 어떤 날은 꾸지람을 하면서 시안을 수정시킨다. 물론 칭찬할 때도 마찬가지다. 적당한 긴장감이 필요한 순간과 자신감을 주어야 할 순간을 구분해서 조직을 이끌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프레젠테이션하기 정말 좋은 타이밍은 나의 멘탈이 최고조에 달 했을 때, 어떤 태클에도 담담하게 혼날 각오가 되어있을 때, 그리고, 뜻밖의 칭찬에 누구보다 멀리 뛸 준비가 되어있을 때다.
많은 직원들이 모인 회의실에서 윗분의 꾸지람을 듣는 걸 억울해하지 말자. 그건 가끔 나한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닌 경우가 있으며, 끝까지 잘못하지 않았다는 걸 어필하는 건 어리석다.
내가 떨리는 마음으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것처럼, 그분들도 그리고 팀장들도 팀원들에게 떨리는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한 것 뿐 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