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
회사를 다니면서 야간 대학원에 다녔고, 논문 때문에 브랜드 관련 책들을 인터넷으로 구매했었다.
표지가 두꺼운 양장제본으로 되어있는 브랜드 관련 이론서적들이 마치 판사님들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법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책만 봐도 정이 뚝 떨어지는데 목차는 더 가관이었다.
영어 반 한글 반에 알쏭달쏭한 전문용어들까지, 이건 마치 암호해독 수준이었다.
그래서 작전을 바꿨다.
브랜드 관련 강의를 모두 찾아서 들었다.
아무래도 읽는 것보다는 듣는 게 더 이해가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튜브나 온라인 강의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오프라인 강의를 이곳저곳 찾아다녔고, 같은 강의를 여러 번 듣기는 좀 민망하니 어려운 부분은 비슷한 강의를 또 찾아서 들었다.
가끔은 고맙게도 쉽게 설명해주시는 강사 분들도 계셨지만, 아무래도 생소한 분야이다 보니 이해가 되는 부분보다 그렇지 않은 부분이 더 많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브랜드에 대해 알듯 말듯 한 상태에서 강의로나 듣던 마케팅 업무를 실제로 하게 되었고, 나의 마케터 인생은 디자이너로 일한 기간에 비하면 비교가 안될 만큼 짧았지만, 내 삶에 주는 임팩트는 훨씬 컸다.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다.
정확히 10년 전 이맘때의 일이다.
신제품 세제를 개발해서 론칭하고 난 후 BM(Brand Manager)들과 홍보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 꽤 잘나가는 연예인을 모델로 광고를 찍었지만 문제는 광고 촬영비나 모델료보다 훨씬 비싼 매체비 때문에 광고를 마음껏 틀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공중파의 위력이 유튜브나 케이블 TV에 비해 월등이 힘이 있었고, 주부들이 타깃인 모든 브랜드들의 광고는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나 예능프로 시작 전 시간대를 선호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할 뿐 아니라 비용도 꽤 비쌌다.
신제품은 매장에 쫘악~ 깔렸고, 우리가 광고를 트니 경쟁사들도 광고 편성을 늘리고 난리가 아니었다.
그때 BM이 브랜드 홍보를 위한 아이디어를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플래시 몹(Flash Mob) 행사였다.
큰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임팩트 있게 홍보를 할 수 있는 마케팅 활동이라는 거였다.
플래시 몹은 특정 웹사이트에 사람이 갑자기 몰리는 현상을 뜻하는 플래시 크라우드(Flash Crowd)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는 집단인 스마트 몹(Smart Mob)의 합성어로 불특정 다수들이 SNS나 전화, 이메일을 통해 한 장소에 모여 약속된 행동을 짧게 하고 흩어지는 번개모임 같은 일종의 퍼포먼스이다.(Wikipedia 참조)
설마~ 이게 진심일까? 취지는 좋지만..... 이렇게까지....
머릿속이 복잡한 나와는 달리 BM은 진지했다. 오히려 신났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았다.
BM은 아이디어를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말릴 틈도 없었고, 그럴 명분도 없었다.
"나이 많은 사장님과 임원 분들, 배 나온 부장님들이 함께 춤을 추시면 홍보효과가 더 있을 것 같아요. 장소는 누구나 볼 수 있는 탁 트인 공간으로다가........."
점점 일이 커져갔다.
부장님들은 그렇다 치고, 사장님과 임원 분들까지 춤추시게 하라고? 오 마이 갓!
회의가 끝난 후 BM은 빛의 속도로 기획안을 만들었고 나에게 가져왔다.
'그래, 자식을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브랜드만 만들었다고 끝난 게 아니고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서포트를 하는 것도 부모의 책임인 거지.'
난 다시 심호흡을 했다.
이 기획안에는 얼마나 엄청난 것들이 들어있을까?
기획안의 내용은 내가 그동안 무엇을 상상했든 그 이상이었다.
제목은 그럴듯했다.
'환경을 생각하는 세탁세제 정량 사용 캠페인 플래시 몹'
플래시 몹에 참석하는 대상은 한 명도 예외 없이 본사에 근무하는 전 직원. 사장님, 임원 분들은 당연히 포함이다. 오히려 메인이다. 맨 앞줄.....
장소는 넓고 탁 트인 시청 앞 광장... (시청 앞 광장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게 야속했다.)
시간은 차들도 많고, 출근하는 사람들도 많은 아침... (하필, 출근 시간대)
음악과 춤은 친환경세제 송 및 안무 개발... (최소의 비용으로 하겠단다.)
홍보팀의 협조를 받아 언론사 인터뷰 및 촬영... (조용히 끝내긴 힘들듯.)
전 직원 행사의상 착용... (옷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튀지 않는 디자인으로 내가 직접 골라야겠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아직 여름도 아닌데 얼굴이 화끈거리고,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결정타는 한 달 반 동안 전 직원 아침마다 한 시간씩 춤 연습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나마 이 기획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을 발견했는데, 광고 모델의 얼굴 가면 착용이었다.
다행히 얼굴은 가려지는구나... 생각하니 좀 기분이 나아지는 듯했다.
기획안을 다시 간단히 요약하자면,
200여 명의 직원들이 시청 앞 광장에서 환경을 보호하는 세탁세제 정량 사용을 독려하는 춤을 10여 분간 추는 플레시 몹 행사를 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사장님을 모시고 회의를 진행하는 날이 왔고, 난 별 부담 없이 기획안을 보고 드렸다.
차라리 회의에서 이건 무리다 라는 결론이 나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깨끗이 접을 명분도 있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사장님께서는 너무 재미있어하셨고, 임원 분들은 아직 그분들에게 미칠 여파를 눈치채지 못하시는 분위기였고, 부장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지만, 그 어떤 반대도 할 수 없는 미묘하고 복잡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아침 전 직원들이 함께 모여서 춤을 추게 되었다.
“짜서 쓰는 세제~ 물도 아끼고 빨래도 깨끗~
고농축 스마트 세제~ 생활비를 줄여주는 세제~
땡큐 땡큐~”
대충 이런 노랫말로 작곡한 음악에 맞추어 빨래할 때 하는 동작인 세제를 짜고, 넣고, 빨래를 널고 하는 동작들로 간단한 안무를 만들었다.
춤 연습 시작 첫날, 사장님께서는 의욕적으로 임원 분들과 함께 맨 앞줄에서 춤 연습을 시작하셨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뒤로 물러나셨고, 마침내 너무 힘드시다며 허리를 부여잡고, 파스 냄새를 풍기며 맨 뒷줄로 물러나셨다.
덕분에 신입사원들을 비롯한 젊은 직원들이 앞장서서 그동안 숨겨놓았던 춤 실력을 발휘하며 윗분들의 공백을 매웠고,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한 타부서 직원들과도 같이 나란히 서서 춤을 추는 사이가 되고 보니 어색했던 직원들 간에 친밀감도 높아졌다.
아침마다 춤을 추니 일할 에너지를 아침에 다 써서 사무실에서 꾸벅꾸벅 존다는 항의가 들어오기도 했고, 아침마다 운동시켜줘서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니 고맙다는 긍정의 메시지를 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어찌어찌 춤을 춘지 한 달 정도가 되니 제법 동작도 세련되어지고 이제는 음악만 나와도 몸이 자동적으로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리고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D-1일 아침 사무실로 출근한 전 직원의 책상위에는 미션박스가 놓여있었다.
그 안에는 다음날 입을 의상, 광고모델의 얼굴가면, 그리고 샘플링 할 제품들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D-Day.
우리 팀은 아침 일찍 시청 앞 광장에서 주변정리를 했고, 날씨와 동선 등을 체크했다.
약속된 시간이 가까워지자, 멀리서 직원들이 한 명씩 도착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플래시 몹 퍼포먼스가 시작되었다.
사방에서 가면을 쓴 직원들이 우르르 뛰어나오고, 익숙한 음악이 흐르고 모두 모여 그동안 힘들게 연습했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자 지나가던 행인들, 출근하던 사람들, 신호대기에 서있는 차량 운전자들, 건물 창문에서 내다보는 사람들, 문을 열고 있던 상점 직원들에게 일제히 시선이 집중되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처음 경험해보는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에 직원들은 가면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그냥 그날을 즐겼다.
이 행사는 끝나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직원들 간에 회자가 되었고, 그 음악만 나오면 나도 모르게 몸이 리듬을 탔다.
TV에서는 열심히 브랜드를 광고하고 있었고, 매장에서는 판매사원들이, 그리고 이렇게 전 직원들이 함께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고생한 덕분에 신제품의 매출은 연일 상승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BM이 6개월만 쉬어도 그 브랜드는 이미 소비자들에게서 잊혀진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잠시도 쉬지 못하고, 끊임없이 브랜드를 돌아보고 케어하는 BM들과 그 브랜드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직원들의 노력이 함께 브랜드를 성장시키고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SNS나 유튜브 채널을 활용한 브랜드 홍보가 늘어나고 있는 요즘에는 예전처럼 직접 밖으로 나가서 브랜드를 홍보하는 경우는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채널만 바뀌었을 뿐 브랜드 홍보는 생각만으로는 되지 않으며, 직접 실천하고 몸으로 뛰어야 가능한 일이다.
브랜드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키워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나는 몇 년 전에 산 법전처럼 생긴 두껍고 무거운 브랜드 책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물론, 가끔 모르는 것을 찾아보기 위함도 있지만, 무엇보다 책꽂이에 꽂아 놓으면 꽤 근사해 보인다.
딸 친구 엄마들이 집에 놀러 와서 그 책을 보면 꼭 한 마디씩 한다.
"어머! 태희 엄마. 디자이너들도 이렇게 어려운 공부를 해요? 너무 멋져요."
난 드디어 그 책의 용도를 찾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