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 디자이너라고요?
회사에서 가끔씩 여러 부서가 함께 워크숍을 가곤 했었다.
창의력은 천정의 높이와 비례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워크숍은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공기 좋은 곳에서 하늘을 천정삼아 하곤 했었다.
워크숍이 끝나면 다 같이 모여 회식 겸 저녁식사를 함께하면서 모두가 힘을 모아 좋은 제품을 만들어 성과를 낼 것을 다짐하기도 했었다.
어느 해였는지, 디자인팀과 설계팀이 모여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연구소에서 먼저 저녁식사 장소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연구소 소장님께서 우리 팀을 찾아다니셨는지 멀리서 우리들을 발견하시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소리치셨다.
"껍데기~ 껍데기들 맞지~ 여기야. 얼른 와. 여기는 알맹이 밖에 없어~"
설계팀과 디자인팀을 한방에 부를 방법을 찾다가 껍데기라는 용어를 찾아내셨고, 연구소는 알맹이로 표현한 소장님의 기가 막힌 비유에 모두들 배꼽을 잡았다.
껍데기든, 포장이든, 패키지든 모두가 같은 의미지만 여전히 패키지디자인이라는 분야를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예전에는 주로 포장디자인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포장디자이너라고 소개를 하면, 사람들은 꽃꽂이처럼 가끔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가르쳤던 선물포장 같은 걸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개념이 완전히 다르진 않지만 다양한 제품들의 패키지를 예로 들면서 부연설명을 해야 했다.
그렇게 부연설명까지 하고 나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 이해를 했다.
대학교에도 포장디자인학과가 있어서 전문 포장디자이너를 배출하기도 하고, 포장디자인 분야만을 연구하기도 했었는데, 요즘에는 제품의 패키지디자인 영역을 브랜드 아이덴티티의 일부로 보는 경우가 많다.
학교뿐 아니라 전문 디자인 회사들에서도 포장디자인이나 패키지디자인 회사라는 용어 대신 브랜드디자인 회사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한다.
물론, 브랜드라는 용어가 더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브랜드를 기억할 때 그 제품의 로고체나 심벌마크와 함께 패키지의 컬러나 이미지를 같이 연상하기도 하고, 그런 아이덴티티 요소들을 브랜드와 일체화시켜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빨간색 신라면 포장지와 로고체, 노란색의 오뚜기카레 포장지와 심벌마크를 생각하면, 이런 요소들은 패키지디자인의 수준을 넘어, 이미 브랜드자체로 생각되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요소라도 빠지면 같은 제품이 아니라고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브랜드디자인을 한다고 소개를 하면, 브랜드라는 용어가 너무 광범위해서 사람들은 브랜드와 패키지를 매치시키지 못했다.
브랜드라는 용어에서 삼성이나 애플 같은 유명한 기업들을 상상했고, 그런 회사의 로고체나 심벌마크를 디자인하는 걸 브랜드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생각도 틀린 건 아니다.
이처럼 브랜드라는 용어 안에는 다양한 의미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껍데기는 물론이고 포장이나 패키지를 설명하는 건 5분도 채 안 걸리지만, 브랜드를 설명하는 데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심지어 나도 브랜드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었다.
브랜드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브랜드디자이너라고 말하는 게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서 브랜드관련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관련서적들을 읽고, 강의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분명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내가 패키지디자이너라고 생각할 때와 브랜드디자이너라고 생각할 때가 일을 대하는 자세가 많이 달랐다.
패키지디자인을 할 때에는 단순히 ‘이 제품을 어떤 컬러로 디자인을 해야 다른 제품과 차별화되고 눈에 띌까?’를 고민했다면, 브랜드디자인을 할 때에는 제품보다 브랜드를 보게 되면서 ‘어떤 컬러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브랜드의 아이덴티티에 맞는지, 우리 브랜드가 시장에서 선점해야 할 컬러는 어떤 건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패키지디자인을 단순히 디자인영역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라는 좀 더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나무보다는 숲을 보게 되었다는 표현이 적합할지 모르겠다.
또한, 제품을 리뉴얼하면서도 패키지디자인 관점에서는 어떻게 리뉴얼된 콘셉트를 잘 표현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서 디자인을 했었다면, 브랜드디자인 관점에서는 현재 제품의 디자인에서 소비자의 기억 속에 남겨 브랜드의 아이덴티티가 되어야 하는 요소와 제거하거나 변경해야 할 요소들을 먼저 찾고, 그 기준에 맞게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소비자들의 혼돈을 막기 위해 제품이 리뉴얼되었는지 인지하지 못하도록 디자인을 할 것인지, 제품에 신선함을 주고, 리뉴얼되어 새로워졌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을 할 것인지를 브랜드 관점에서 생각하면서 디자인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의 방향이 바뀌다보니 당연히 윗분들께 디자인을 보고하거나 마케팅부서와 대화하는 방법도 달라졌다.
디자인 시안이 새롭다, 예쁘다의 관점이 아닌, 브랜드의 라이프 사이클 상에서 어떤 디자인시안이 적합한지, 베리에이션 제품들을 지속적으로 출시하면서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지켜갈 것 인지처럼 좀 더 전략적인 관점에서 디자인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브랜드를 모르면 신제품의 디자인방향을 잡기도 힘들고, 디자인을 리뉴얼 할 때마다 마케팅의 논리에 따라 끊임없는 디자인 수정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디자이너들도 브랜드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브랜드디자이너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