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이사했을 때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했던 공간은 아파트의 베란다였다.
아파트가 바닷가에 있어서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바닷물이 한눈에 들어왔고 베란다에 나와 넓은 바닷물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는 빽빽한 아파트 숲에서 살다가 인구도 적고 한적한 도시로 이사를 오니 삶도 여유로웠고,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과 아침햇살 때문인지 바닷가 펜션에 여행을 와 있는 듯했다.
집집마다 예쁜 화분과 멋스러운 의자들로 꾸며놓은 아파트 베란다가 신기하기도 하고 예뻐서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특히, 부러웠던 것은 아파트 베란다마다 하나씩 있는 바비큐 그릴이었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집집마다 바비큐 그릴에서 나는 스테이크 굽는 냄새와 연기가 군침을 돌게 했고, 주로 남편들이 두껍고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 고기를 가지고 나와서 굽곤 했는데 그 모습도 보기 좋았었다.
여유 있게 베란다 테이블에서 가족들이 모여 스테이크와 샐러드, 그리고 와인을 곁들여 저녁시간을 즐기는 덴마크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이곳이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우리도 서둘러 베란다에서 사용할 작은 식탁과 바비큐 그릴을 장만했고 예쁜 화분들도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모든 게 완벽한 것처럼 보였다.
와일 셀러가 아파트 주방에 빌트인으로 되어있어서 값이 저렴하면서도 맛있는 와인들을 골라 와인셀러를 채웠다. 내가 꿈꿔왔던 모던한 북유럽 디자인의 주방에서 우아하게 샐러드를 만들고,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베란다 테이블에서 예쁜 그릇들에 차려진 맛있는 스테이크와 와인을 먹을 생각을 하니 너무 행복했다.
여느 집처럼 저녁시간에 스테이크를 굽는건 당연히 남편의 몫이었다.
딸도 그릴이 신기한지 즐겁게 아빠를 도왔고,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데는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할 일은 고작 맛있는 빵과 스테이크용 고기, 그리고 샐러드용 채소들을 사고, 가족 취향에 맞는 소스를 골라서 미리 사다 놓는 일 정도가 전부였다.
마트에 가보니 스테이크뿐 아니라 딸이 한국에서 그토록 좋아했던 피자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모양과 컬러가 정말 다양해서 한 번씩 다 먹어보려면 몇 달은 족히 걸릴 것 같은 파스타들이 냉장고에 가득했다.
덴마크 사람들도 거의 주식처럼 먹는 음식이 피자와 파스타였기 때문에 반조리 식품도 많았고, 피자를 먹자고 굳이 외식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행복한 일주일이 흘렀다.
하지만, 한국사람이 얼마 동안이나 피자와 스파게티, 그리고 스테이크만으로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을까?
일주일이 지나니 식탁에 한국음식이 한개씩 오르다가 결국, 덴마크로 이사한 지 3개월이 되어가자 난 모던한 북유럽 주방에서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김치를 잘 먹지도 않던 남편도, 딸도 어찌나 김치를 찾는지 사 먹는 김치로는 감당이 안돼서 아시안 마켓에서 배추를 사다가 김치를 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곳에서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었다.
그런데, 사람 입맛이 참 신기하게도 어릴 적부터 먹던 가락이 있어서 그런지 그때그때 상황이나 계절, 날씨에 따라서 먹고 싶은 김치가 달랐다.
봄이 되니 배추김치가 시들해지고 상큼하고 아삭 거리는 오이소박이가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여름에는 새콤하면서도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해주는 열무 얼갈이 물김치가 땡겼고, 가을에는 잘 익어 아작아작 씹히는 총각김치가, 그리고 겨울이 되니 액젓에 푹 익어 깊은 감칠맛을 내는 파김치가 너무 그리웠다.
어렵게 사골을 구해서 곰탕을 끓여먹으면 꼬들한 식감의 푹 익은 섞박지 김치가 생각났고, 고구마를 구워 먹다 보면 목이 막혀서 알싸한 동치미 국물 생각이 간절했다. 한국에서 어렵게 공수한 물냉면을 만들어 먹다 보면 시원한 향과 아삭한 식감의 새콤하고 매콤한 열무김치 냉면이 또 그렇게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닭 한 마리를 사다가 푹 끓여서 칼국수를 만들어 먹어도 매콤하고 달콤한 맛의 배추 겉절이가 없으니 금방 질려서 많이 먹기도 힘들었다.
삼겹살을 구워 먹고 나면 입안의 느끼함을 단방에 날려주는 잘 익은 깍두기로 만든 시큼하면서도 매콤하게 씹히는 깍두기 볶음밥을 찾아보며 군침을 흘렸고, 심지어는 한국에 있을 때 그렇게 하기 싫어했던 김장김치를 담그던 날 먹던 매콤하면서도 감칠맛이 나는 싱싱한 김장김치 겉절이와 푹 삶은 돼지고기, 그리고 신선한 생굴을 같이 싸 먹는 보쌈은, 덴마크라는 나라에서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사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리 맛있는 고기를 구워 먹어도, 몸에 좋은 꼬리곰탕을 끓여먹어도, 맛있게 곁들여 먹을 다양한 김치가 없으니 뭔가 허전했고, 음식의 맛을 절반밖에 즐기지 못하니 남편도 나도, 그리고 딸아이 조차도 먹는 시간이 별로 즐겁지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먹을 수 없는 음식에 대한 이상한 집착과 함께 향수병까지 생겼다.
그래서 한 번도 만들어본 적이 없는 다양한 종류의 김치를 직접 담가보려고 했지만 마땅한 재료가 없었다.
유명하고 맛있다는 김치 레시피를 다 가지고 있어도, 이건 재료가 다르고 부족하니 그림의 떡이었다.
덴마크에서 살 수 있는 재료라고는 아시안 마켓에서 파는 작은 알배기 배추와 쪽파인지 대파인지 헷갈리는 모양의 파와 물러져서 김치를 담글 수 없는 쓴 오이뿐이었다, 열무나 총각무 같은 건 없었고, 무도 단무지처럼 길고 가느다란 맛없는 무가 전부였고 심지어 무에는 무청도 없었다.
한국에서는 가까운 마트만 가도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커다란 무와 오이, 쪽파, 그리고 열무 같은 재료들이 그리웠다.
무심코 습관처럼 먹었던 김치들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김치들을 먹을 수 없다 보니 그렇게 많은 종류의 김치들을 계절마다 바꾸어 먹으면서도 그 존재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까지 했다.
그리고, 다양한 음식들과 어울리는 각종 김치들이 우리의 입맛을 돋우어주고 있었다는 사실도 새삼 알게 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설렁탕이 맛있는 게 아니라 설렁탕과 같이 먹는 김치 때문에 설렁탕이 맛있게 느껴지는 거였다.
김치를 좋아하셨던 친정엄마가 항상 맞벌이하는 우리 가족을 위해 김치를 따로 담가주시곤 했었기 때문에 그냥 때가 되면 당연히 먹을 수 있는 음식 정도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
덴마크에 이사온지 6개월 정도가 되니 이제는 베란다의 그릴은 뚜껑도 열지 않는 날이 허다했고, 더 이상 스테이크나 피자 같은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도저히 이런 음식만 먹고는 살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먹는 즐거움이 없으니 바닷가 아파트의 아름다운 경치도 더 이상 의미가 없었고, 행복한 나라 덴마크에서 우리 가족은 더 이상 행복하지도 않았다.
맛없는 천국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냥 무작정 덴마크에 있는 재료들로 한 가지씩 김치를 담가보기 시작했다.
우선 첫 번째로 도전한 건 오이소박이였다.
오이소박이를 담글 수 있는 적당한 오이를 찾기 위해 오이를 종류별로 구입해서 김치를 담가보고 무르고 쓴맛이 나는 건 버리기도 하고, 절이는 방법을 바꿔보기도 하면서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작은 오이피클용 오이로 그래도 나름 괜찮은 오이소박이를 담글 수 있었다.
신선하게 잘 익은 오이소박이를 거의 1년 만에 먹으니 살 것 같았다.
섞박지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무 종류도 한 가지밖에 없으니 덴마크에서 오래 살고 계시는 분들에게 조언을 구해 맛없는 무에 설탕 파우더와 소금을 조금씩 넣어 오랜 시간 절이는 방법으로 김치를 담갔다.
물이 많은 덴마크 무의 꼬들한 식감을 위해서 하루 종일 절여 무의 물을 빼줘야 했고 시간이 꽤나 많이 걸렸다.
동치미는 의외로 쉽게 담글 수 있었다.
동치미 국물에 설탕 대신 넣은 사이다가 꽤나 그럴듯한 톡 쏘는 맛을 냈고, 가끔 한국배를 중국 마켓에서 구할 수도 있었다.
남편이 전날 술을 많이 마시거나 우리 가족이 모여 고구마를 구워 먹는 날이면 이젠 동치미 국물이 구세주로 등장했다.
문제는 열무김치와 총각김치였다.
열무김치는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서 서양 무라고 불리는 빨간 레디쉬로 만든 열무김치와 비슷한 레시피를 찾았고, 그걸로 담갔는데, 아무래도 빨간색 무가 익숙하지 않아서 껍질을 모두 벗겨내고 다시 담갔다.
제법 그럴듯하게 열무김치와 비슷한 맛을 냈다. 가끔 냉면이나 비빔국수에 넣어 먹으니 그래도 매콤한 열무 비빔국수에 대한 건 좀 해소가 되는 것 같았다.
이쯤되니 생각보다 김치가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김치 담그기에 자신감까지 생겼다.
우리 가족이 가장 먹고 싶어 했었던 김치는 총각김치였는데, 총각무는 아무리 코펜하겐의 모든 마켓들을 샅샅이 뒤져도 살 수가 없었다.
덴마크의 전통 마켓들은 물론, 중국 마켓, 태국 마켓, 이란 마켓까지 전부 뒤져도 총각무를 먹는 민족은 우리나라뿐인 것 같았다.
덴마크에서 30년간 살아오신 분들도 한번도 본적이 없다고 하셨고, 거의 포기상태로 있었는데, 우연히 덴마크에서 가까운 독일 마켓에서 인터넷으로 살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드디어 총각김치까지 먹을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인터넷을 뒤져 마켓은 찾았는데, 총각무가 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인터넷에 뜨는 즉시 품절이 되어서 좀처럼 살 수가 없었다.
인터넷을 매일 켜놓고 검색한 덕분에 어렵게 총각무를 구했고, 무려 10단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양을 사서 마치 김장김치를 하듯 대대적으로 총각김치를 담갔다. 김치가 익기가 무섭게 하얀 쌀밥과 함께 드디어 총각김치를 먹을 수 있었다.
잘 익은 총각김치를 크게 한입 베어 무니 아작아작한 식감의 새콤하고 매콤한 무의 맛은 물론, 그토록 그리웠던 총각무의 줄기 부분에서 느껴지는 아삭하면서도 질깃하게 씹히는 식감이 너무좋아서 삼키기가 아까울 정도였고 행복감이 절로 밀려왔다.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고, 총각김치가 있으니 느끼했던 고깃국도, 질리도록 먹었던 미역국도, 그리고 심심하던 배추 된장국도 더 이상 그동안 먹던 그저 그런 음식이 아니었다.
마치 총각김치를 먹기 위해 그런 음식들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총각김치 하나로 다시 행복해졌고, 이제야 베란다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 파김치와 깍두기, 깻잎김치와 부추김치, 그리고, 드디어 덴마크로 이사한 지 2년 반 만에 김장김치까지 담게 되었다.
김장날 친한 한국 교민분들을 집에 초대해서 그렇게 먹고 싶었던 김장김치 겉절이에 푹 삶은 돼지고기와 생굴을 넣고 보쌈을 만들어 함께 나누어 먹으니 이젠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덴마크에서 김장을 한 건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모두들 놀라움을 금치 못하셨고, 난 친한 동생과 같이 배추 45포기로 김장을 해서 초대한 손님들에게 담근 김장김치를 한 포기씩 나누어 주었다.
아직도 덴마크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김장김치를 맛있게 모여서 먹던 그날의 흥분과 가족처럼 지내던 교민분들의 즐거운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만큼은 더 이상 김치가 반찬이 아니었고, 김치를 먹기 위해 돼지고기를 먹었고, 김치를 먹기 위해서 생굴을 직접 까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언제부턴가 와인셀러에 와인 대신 자리잡기 시작한 막걸리에 김장김치 겉절이로 만든 보쌈은 최고의 안주였다.
그날 우리가 먹은 겉절이 김치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리운 고향의 맛을 찾아 만들기 시작한 나의 김치 담기 프로젝트는 순간순간 힘은 들었지만 맛있게 먹어주는 가족들과 친구들 덕분에 즐겁고 보람도 있었다.
이렇게 김장김치까지 만들어 먹게 되니 이제는 한국음식에 대한 욕심이 더 생겼고,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는 아파트 베란다에 예쁜 꽃화분 대신 꽃보다 더 예쁘고 귀한 깻잎과 상추를 심었다.
뿐만 아니라, 봄에는 무말랭이를 만드는 무꽃이 테이블 가득 피었고, 가을엔 반건시를 만드는 감과 알알이 귀엽게 말라가는 도토리의 은은한 향이 베란다에 가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겨울이 되면 바닷바람에 꾸덕꾸덕하게 굴비로 말라가는 조기비늘의 영롱한 빛깔이 아름답게 보였고, 이제 나에게 아파트 베란다는 단순히 여유를 즐기는 공간 그 이상이었다.
역시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맞았다.
뭐니 뭐니 해도 행복 중에 가장 큰 행복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느끼는 입안의 행복이다.
그리고 한국사람들에게 그 맛의 시작은 맛있게 잘 익은 고향의 맛, 김치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먼 이국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고향의 음식을 나눠먹던 행복한 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지금, 타국에서 재료 구하느라, 김치 만드느라 고생했던 추억을 떠올리면서 난 아직도 김치를 사 먹지 않고 담가먹는다.
우리 가족에게 다시, 먹는 행복과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던 귀한 김치 재료들을 보면 새삼 감사함도 느낀다.
한국에서도 이제는 김치를 만들어 먹지 않고 사 먹는 집들이 점점 많아지고, 김장을 하는 사람들도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난 한국에 온 이후로 먼 이국땅에서 고생하면서 쌓은 실력으로 더욱 건강하고 맛있는 제철 재료들로 김치를 직접 담가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당분간 우리 가족은 맛있는 한국음식들 덕분에 외국에 나가서 오랜 기간 있을 일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