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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ISU Apr 05. 2020

날카로운 콘셉트가 디자인을 살린다

고급스럽고, 모던하고, 내추럴하지 않은 디자인은 없다

"이번 시안의 디자인 콘셉트는 뭔가요?"

"A안은 고급스러운 방향이고요, B안은 모던한 방향이고, C안은 내추럴한 방향입니다."

인테리어 디자인부터, 자동차 디자인, 그리고 과자 포장지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디자인 방향이 바로 고급스럽고, 모던하고, 내추럴한 디자인 방향이다.

하물며, 디자인 방향과 디자인 콘셉트는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 이건 완전히 동문서답이 따로 없다.

하지만 의외로 오랜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들도 디자인 방향과 콘셉트의 차이를 모르는 경우가 있다.     

고급스럽게 디자인하는 방법은 수 십, 수 백 가지에 이르고, 모던하거나 내추럴한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이런 광범위한 방향을 콘셉트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제품의 본질과 소비자의 니즈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 더 깊숙한 곳에 있는 디테일한 디자인 콘셉트를 찾아낼 수가 있고, 한 번 그 깊이를 경험한 디자이너는 콘셉트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제품과 소비자에 대한 이해를 통해 디자인 콘셉트를 찾아내는 일은 패키지 디자이너의 가장 핵심이 되는 업무이기도 하다.

브랜드의 로고체를 만들고, 디자인 소스들을 찾아 레이아웃을 하는 물리적인 작업은 디자인 콘셉트를 날카롭게 잡을 수만 있다면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직접 할 필요도 없다. 

외주 업체를 활용하거나 경력이 많지 않은 팀원들도 감각만 있다면 충분히 같이 할 수 있는 업무이다.

이렇게 중요한 디자인 콘셉트를 어떻게 하면 잘 잡을 수 있을까?     

디자인 콘셉트를 잡는 단계는 디자인 기획 부분이기 때문에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함께 논리력이 요구된다.

나에게 일을 의뢰한 상대가 마케팅이든 클라이언트든 사장님이든 설득해야 할 대상이 있기 때문에 디자인 콘셉트가 설득논리로써 충분한 역할을 해야 하고소비자들이 제품을 접했을 때에도 그들의 시선을 잡아주는 것이 바로 디자인 콘셉트이기 때문이다.

논리력은 얼마나 내가 디자인할 제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가?, 그리고 타깃 소비자들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가에서 출발한다여기에 디자이너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접목된 것이 디자인 콘셉트이다.

당연히 좋은 디자인 콘셉트는 제품에 대한 깊은 이해 타깃 소비자들에 대한 탁월한 공감력 디자이너의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조합인 것이다.     

마케팅이나 클라이언트에게서 받는 신제품 개발계획서에는 전체 개발 일정 이외에도 제품의 마케팅 콘셉트를 비롯해 소비자관련 내용들이 상세히 적혀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이 마케팅 콘셉트이다. 

마케팅 콘셉트는 일반적으로 소비자와 제품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압축해서 만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디자인팀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 회사의 여드름 전용 화장품 브랜드를 리디자인 한 적이 있었다.

디자인 콘셉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제품의 디자인 콘셉트 개발 사례에 대해 잠깐 얘기해 볼까 한다.

이 제품은 1998년 국내 최초의 여드름 특화 화장품 브랜드로 탄생해 10대들 중 특히 여드름 피부로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무척이나 인기가 있었던 브랜드였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요즘 청소년들은 여드름이 심해지면 피부과를 찾아 레이저 시술을 받기도 하고, 피부과에서 판매하는 화장품을 사용하기도 한다.

의사가 추천하는 화장품에 더 신뢰가 가는 건 당연하다.

피부과에서는 이런 심리를 이용하는 화장품들이 많이 출시되어 있었고, 제약회사들 역시 자신들의 백그라운드를 활용한 00제약 화장품들을 속속 개발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프랑스나 독일에 한 번쯤 여행을 가본 사람이라면 해외에서도 코슈메슈티컬(Cosmetics와 Pharmaceutical의 합성어로 의약품의 전문적인 치료 기능을 포함한 화장품) 브랜드라고 불리는 의약화장품들이 얼마나 많이 판매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국내에서도 의약화장품 카테고리가 생겨나고 있는 거였다.

마케팅은 지난 10여 년 간의 트러블 피부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해온 여드름연구소의 축적된 전문성을 토대로 기존 브랜드를 여드름 뿐 아니라 트러블 등 문제성 피부까지 케어 가능한 더마 코스메틱 브랜드로 영역을 확장시키면서 재론칭 하고 싶어 했다.

사실 이 브랜드야 말로 의약화장품 시장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이미 의약화장품이었다.

여드름 피부를 소독하고 치료효과를 주면서 보습이나 영양공급까지 해주는 화장품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프랜차이즈형 브랜드숍과 같은 신규 유통채널이 새롭게 등장하며 한 동안 적합한 판매채널을 찾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 조사를 바탕으로 분석해 본 결과 여전히 이 브랜드의 인지도가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기존 브랜드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해달라는 마케팅의 요청이 있었다.

그렇지만 기존의 용기를 계속 사용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고, 제품의 용기를 신규로 개발하기 보다는 프리몰드(이미 개발되어서 판매하는 범용적인 화장품 용기) 용기를 활용해서 디자인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고, 패키지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경험이 많은 외주업체를 컨택했지만, 함께 디자인 콘셉트를 잡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미 국내 화장품 브랜드, 해외 브랜드들은 물론, 제약회사 제품들까지 모두 뛰어들고 있는 시장이었다. 

제약회사들은 플러스 모양의 병원 마크를 제품에 달아 마치 엄청난 효능이 있는 것처럼 디자인하였고, 화장품 회사들은 독특한 용기와 재질을 활용해서 디자인에 화장품의 고급진이미지를 풍기며 차별화하고 있었다.

디자인 방향을 잡기가 쉽지는 않았다.

우리는 병원이나 제약회사와 같은 백그라운드는 없었지만, 국내 최초이면서 아직까지도 현존하는 유일한 여드름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이런 강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외주업체와 여러 번의 아이데이션 회의를 진행했고, 우리는 힘들게 최종 디자인 콘셉트를 잡을 수 있었다.     

이 브랜드의 리포지셔닝 디자인 콘셉트 스토리는 이러했다.

여드름 화장품의 원조라는 아이덴티티를 살리면서 회사만의 오래된 독자기술을 강조하는 맞춤형 화장품이라는 콘셉트로 방향을 정했다. 

이는 모디슈머(modify+consumer) 열풍으로 능동적인 소비자들이 많아지면서 기존 제품을 자신의 취향대로 재창조해서 즐기는 소비자들이 급부상 하는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다.

내 피부 상태에 맞춘 맞춤형 제품을 잘 표현하기 위한 콘셉트 스토리는 내가 해외에서 살 때 자주 보았던 약국의 약병에서 얻은 아이디어였다. 

병원에서 자신의 상태에 맞는 처방을 받아 약국에 가면 오렌지 컬러의 약병에 처방전대로 약을 담아주고 주의사항이나 꼭 지켜야 할 내용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스티커 라벨을 붙여주곤 했었다.

약국에서 약을 지어오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

이 약만 있다면 내가 병에서 나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심리적 안도감?

주의 사항을 꼼꼼히 알려주고 스티커까지 붙여주는 약사님의 모습을 통해 전문성에 대한 신뢰와 믿음?

이런 마음을 이 약병 하나로 느낄 수가 있었고 우리는 이 브랜드의 리포지셔닝 콘셉트 스토리를 '희망을 담은 약병의 신뢰감 있는 이미지'로 정했다.

콘셉트를 최종 디자인으로 구현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브랜드 이미지는 메인 컬러였던 오렌지 컬러를 유지하면서 기존 고객들에게 브랜드를 쉽게 연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모든 경쟁사에서 사용하는 변별력 없는 플러스 모양의 병원 마크 대신 다양한 기능성 아이콘들을 만들어 전면에 삽입하였고, 제품의 특징을 알리는 스티커를 만들어 약병에서 느껴지는 의약품의 이미지와 맞춤형 제품의 이미지를 최대한 살린 이성적인 디자인으로 소비자들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제품 출시 후, 좋은 디자인 덕분에 드럭스토어에 빠르게 입점 되었고, 화이트 컬러 일색인 의약화장품 매대에서 가시성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이 브랜드의 디자인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날카로운 콘셉트는 디자인을 차별화해줄 뿐 아니라 물리적인 디자인 시간도 줄여준다.

디자인을 처음 시작할 때 컴퓨터 앞에 앉아 시안작업부터 하는 습관은 생각의 힘을 방해하고 콘셉트를 약하게 만든다.

브랜드에게 주어진 환경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디자인을 시작하기 전 충분한 시간을 갖고 하나하나 논리를 찾아가다 보면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깊은 곳에 숨겨져 있어 보이지 않던 아이디어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날카로운 콘셉트가 있다면 디자인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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