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파전 Aug 09. 2021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영화


 어렸을 때 수줍음이 많은 편이었다. 혼자 있는 걸 좋아했고 집에서 할 만한 취미를 이것저것 건드려 보았다. 조용하고 숫기 없는 남자애가 빠져들만한 것은 많았다. 책을 읽을 때도 있었고, 게임을 할 때도 있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영화를 보는 일이었다.

 왜 하필 영화였는지 생각해보면, 아마 내가 말을 잘 못하는 편이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예전부터 말할 때 재미없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 그냥 입을 다물곤 했다. 말을 잘 못하는 것과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게 대체 무슨 상관이냐면, 지금부터 지껄여 보겠다.




1.


 로버트 맥키는 <DIALOGUE>에서 극의 대사를 세 층위로 구분한다.  

 ‘말해진 것’, ‘말해지지 않은 것’, ‘말할 수 없는 것’.  

 말해진 것은 인물이 다른 이들에게 표현하겠다고 선택한 생각과 감정을 말하고, 말해지지 않은 것은 인물이 자기 안의 목소리로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표현한 생각과 느낌을 말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각할 수 있는 범주 밖에 있어서, 인물이 자기 자신에게조차 언어화하여 표현할 수 없는 무의식적인 충동과 욕망을 말한다.

 

 당신이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친구가 말한다. “그 애가 나한테 나쁜 말을 해서, 화가 나 전기톱으로 머리를 잘랐어.” 당신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 참 힘들었겠다. 지금 기분은 괜찮니?”

 당신은 말을 통해 상대방을 위로하고 걱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건 말해진 것이다. 말해지지 않은 것엔 다른 속내가 있을지 모른다. 당신은 전기톱을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전기톱으로 머리를 자른 건 지나친 처사가 아닌지 의심하고 당혹스러워 할 수 있다. 한편 말할 수 없는 것은 말 위에 있다. 그것은 당신이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이거나, 생각하더라도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친구가 전기톱으로 누군가의 머리를 자른 일에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이 일이 친구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버릴지, 이 경험이 나와 친구의 정서에 얼마만큼의 충격이 될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안다 해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건 말할 수 없는 것일뿐더러 말해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언어는 불완전하다. 삶은 언어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언어는 지금도 변화하며 그 모습을 조금씩 다듬어나가고 있지만, 아직도 모든 것에 확실해질 수 없다. 누적된 137억 년의 우주 앞에서, 46억 년의 생명 앞에서, 고작 몇 만년 된 언어는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이곳은 어떤 곳인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다. 철학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 노력했지만 언어는 자주 그 과정을 방해했다. 미묘한 뉘앙스 차이와 같은 언어의 본질적 한계가 오해를 만들고 이성을 가로막았다. 답답했던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말하려 하는 순간 언어는 지리멸렬해지고 불분명해진다.

 <컨택트>에 나온 것처럼, 인간이 언젠가 더 완벽에 가까운 언어를 알아낸다면 세상을 그만큼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직은 요원한 일이다.




 2.

 

 사람들은 막막하게 느껴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이들은 침묵하기도 했다. 때로는 침묵이 말보다 나을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나처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은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게 당연하다. 그러나 내가 계속 지껄이는 이유는 침묵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 다가갈 수 없는 것을 그러한 상태로 내버려 두기보단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에 좀 더 가닿기를 원한다. 우리는 알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그것을 실천한다. 이 과정을 커뮤니케이션이라 부르고 싶다. 소통이 되지 않는 대상과 소통하고픈 욕망. 내 옆의 사람과, 내가 발 딛고 있는 땅과, 내 이전의 역사와, 그 밖의 모든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가까이하고픈 욕망.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 세상에 떨어진 뒤 다른 존재와 단절되어버린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소통하고 싶어 한다. 진정한 소통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말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극복하려 노력한다. 언어는 소통을 위한 대표적인 수단이지만, 그것이 충분치 않다면 우리는 기꺼이 다른 것들을 소통에 사용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만들어낸 것의 대부분이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마셜 매클루언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텔레비전부터 자동차까지 온갖 것을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만들어진 ‘미디어’라 칭한다. 그에게 미디어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확장하기 위해 만든 모든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이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술은 확실히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언어를 통해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 진정한 소통을 이루려는 아이러니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시가 대표적인데, 보통 시는 알쏭달쏭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야기를 차용하고 문장의 표현력을 극대화하여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개별적인 사건, 사건, 사건의 나열이지만 그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 우리는 하나의 흐름으로 인식하게 된다. 하나의 흐름, 즉 이야기는 두서없이 내용을 전개하는 것에 비해 보다 많은 것을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다.


 다른 예술은 언어를 탈피해 소통을 시도한다. 미술은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무용은 몸의 움직임을 통해, 만화는 글과 이미지와 이야기의 조합을 통해, 음악은 소리를 통해… 이것들은 말로는 전해질 수 없는 것들의 차원에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때로 말을 하지 않고 사진 한 장을 보여주기도 한다. 몸짓으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인간에게 예술이 필수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완전한 소통이라는 목표는 다양한 소통 방식을 모두 동원해야만 어렴풋이 가능하며, 예술은 고차원적이고 섬세한 소통 방식으로서 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3.

 

 영화는 소설처럼 이야기를 사용하고, 대사에 문학적 표현을 넣기도 한다. 화면을 미술 작품처럼 구성할 수도 있다. 시각적 이미지가 아닌 소리와 음악을 통해 관객에게 접근할 수도 있다. 자막을 사용하면 만화처럼 글과 이미지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효과를 줄 수 있다. ‘영화는 종합 예술이다’라는 익히 알려진 말을 길게 늘여 쓴 이유는, 영화가 전방위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영화는 시각과 청각을 모두 이용해 관객에게 다가간다. 4D 영화는 촉각까지 이용한다. 그리고 다른 분야의 예술과 기술에서 유용한 것을 흡수하고 응용한다. 다른 미디어 간의 교류와 간섭은 늘 일어나는 일이지만, 영화는 기술의 발전에 의해 탄생한 이래 언제나 역동적으로 변화에 임했다. 끊임없이 새로우면서도 유용한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고 노력한다.


 다시 마셜 매클루언의 책을 인용하면, 그는 영화를 ‘뜨거운 미디어’로 분류한다. 뜨거운 미디어는 많은 정보량을 가지고, 수용자가 스스로 해석하고 의미를 창조하는 과정을 별로 요구하지 않으며, 감각을 활성화시키기보단 마비시키는 효과를 가지는 매체다. 완전히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내게 하나는 확실하다. 영화는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자극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표적으로 삼음으로서 전방위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한다. 그래서 우리는 별다른 노력 없이 앉아서 눈을 뜨고 귀를 여는 것만으로 영화에 깊이 몰입할 수 있다. 뜨겁기에 매력적이다.


 나는 말을 잘 못하는 편이라 영화에 빠졌다. 영화는 언어적인 것과, 언어적이지 않은 것 모두를 통해 소통한다. 그래서 말하기에 능숙하지 않았던 내가 대리만족을 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말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영화에선 말할 수 없는 것이 말을 통해 표현되기도 하고, 말이 아닌 것을 통해 표현되기도 했다. 가장 직설적인 것부터 가장 미묘한 것까지 넓은 층위의 소통이 영화에서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진정한 소통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아닌 영화에서 느꼈는데, 결국 지금도 그러고 있게 되었다. 아무튼… 영화는 여전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  


 가끔 영화를 보면 이해되지 않는, 난해한 장면이 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감독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를 생각해 본다. 그 사람이 이 장면을 통해 내게 어떤 말을 건네 오는 것인지 생각해 본다. 한 편의 영화는 닿을 수 없는 상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관람자에게 감독이 나름대로 진정한 소통을 시도하려 다가가는 일이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하다 보면 장면이 이해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일이다.




 4.

 

 그러니까 내가 가끔 말이 아니라 이상한 짓을 통해, 이렇게 글을 쓴다거나 하는 식으로 소통을 시도한다면, 내가 여전히 말을 잘 못한다는 것을 떠올려 주길.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걸 말로 할 자신이 없어서 이렇게 돌려 가며 얘기한다는 걸 조금이나마 기억해 주길.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그렇게 말하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이상하게도 난 이런 식으로 소통하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다. 진정한 소통이 어려운 만큼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까.

 정말 이상한 일이다. 다음 인용이 해답이 될 수 있을까? 리카르도 팔치넬리의 <시각디자인> 중 일부분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목표를 명중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차라리 가루받이에 가깝다. 수많은 꽃가루들 중에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어쨌든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이며 시장이 바라는 것처럼 그것을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


 계속 이것저것 건드려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