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자와 동양인이라는 타이틀로 아파하고 있을 당신에게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Racial Hierarchy(인종 계급)에 대하여
요즘 SNS에서 보이는 미국에 사는 한인 커뮤니티 게시글들엔 이런 말이 돈다.
'아시안은 어딜 가도 을이에요 여러분.
가장 차별받고 있는 듯 보이는 African-American보다 우리가 나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요.
안타깝게도 절대 정당화되지 말아야 할 인종의 서열층에 아시안은 가장 아래에 있다는 걸, 항상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SNS 에 올라오는 정보들을 그렇게 신뢰하지도 않을뿐더러,
흔하게 올라오는 선정성 짙은 영상과 더불어 매운 자극을 첨가한 포스팅들 역시 눈길 조차 주지 않고 무시해 버린다. 관심에 목마른 나머지 모든 것을 과장하며 왜곡된 사실을 전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명분을 더해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내 SNS 피드 속 그 짤막한 인종 계급에 대한 포스팅을 다 읽어내고도 손가락은 스크롤을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몇 줄도 안 되는 게시글에 담긴 진한 팩트가 내 속을 쿡쿡 찔러오는 느낌을 받아서였을까.
지금까지 내가 우습다며 거쳐간 수많은 SNS 포스팅 중, 거의 유일무이하게 그 말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랬다.
하와이는 보기 드물게 일본계 미국인, 그러니까 동양인이 주류인 스테이트(state)다.
그런데 그런 이 곳에서도 동양인을 향한 인종차별은 꽤 많은 곳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종종 호주나 미 본토 등지에서 하와이로 건너오는 백인 관광객들 중엔 보란 듯이 아시안을 보고 비아냥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길가에 다니는 일본인 혹은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동양인 여성들을 본인 멋대로 쉽게 보며 서슴지 않고 캣 콜링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덕분에 하와이에는 원주민들이 백인을 비하하고자 뱉어내기 시작한 비속어 'Haole(하올리)'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채 여러 인종의 입을 오르내리고 있다.
차별은 역차별을 부르고,
조롱은 더 큰 조롱으로 되돌아온다.
이번 아틀랜타 총격 사건도 Asian Hate Crime에서 논외 대상은 아니었다.
해당 총격 사건을 목격한 한국인 목격자가 한 한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가해자가 '아시안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라고 발언한 사실이 있음을 증언했기 때문이다.
이는 가해자가 '성 중독(Sexual Addiction)'이 있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아시안을 향한 본인의 증오심을 이용해 범죄로 연결시켰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본 사건 역시 미국 대부분의 총기 난사(Mass shooting ) 사건이 그래 왔듯 개인적 원한은 얽혀있지 않은 무작위의 공격이었으며, 참혹하기 그지없는 또 하나의 억울한 현장이었다.
동양인으로서 나는 크게 분노했지만, 한편으로 차마 끝까지 눌러낼 수는 없는 아주 자연스러운 공포심이 불쑥 올라오기도 했다.
걱정이 앞섰다.
과연 나와 남편이 아무 일 없이 당장 내년이라도 본토에서 살 수 있을까?
과연 정말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과연 나는, 남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생존'할 권리를 찾을 수는 있을까,
최대한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쌓아 온 나의 육체적, 정신적, 하다못해 경제적으로 해 온 노력들이 사실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Asian Hate에 대한 관념은 이미 팬데믹 선언 이후 동양인들의 노력 여부를 떠나 얼룩덜룩한 사회적 시선 그대로 깊숙이 뿌리 박힌 듯 보인다.
이 극도의 긴장감은 과연 코로나가 지나가고 나서는 완화가 되긴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점도 든다.
전염병은 어느 새 지나갈 수도 있지만, 한 번 생긴 편견의 굴레는 벗어나기 힘든 법이다.
나는 분명 양반과 노비의 구분이 없는 시대에 태어났으나, 아직까지도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철저한 인종 계급 사회의 가장 밑에서 여전히 아등바등 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sian Community는 여전히 노력 중
침체되고 위축된 분위기 속 아주 작게나마 솟아오르는 희망이 있다면,
아시안 커뮤니티에 속한 인플루언서들이 분노를 머금고 기꺼이 소리를 내어주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할리우드의 '캔드라 오', 우리나라 팝 스타인 '에릭남', 한국계 배우인 '대니얼 대 킴' 역시 Stop Asian Hate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아시안을 향한 무조건적인 증오를 멈출 것을 촉구했다.
본인의 영향력에 대한 이해가 철저한 사람들이 사회에 건네주는 따뜻한 손길은,
침울한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는 수많은 초점 잃은 아시안들에게 마음을 울리는 위로로 작용했다.
그런데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 와중에도, '아시안'과 '이주자'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계속 살아내야 하는 나의 자존감은 여전히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미 오랜 시간 나도 모르는 새 몸에 스며든 위축감이 고질병처럼 자리 잡아버린 탓이다.
지금 여기서 겨우 일반인에 불과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글을 써내는 것 이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아마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한 겹쯤 깔고서 떳떳하고 당당하다는 제스처를 취한 채, 상처 받지 않은 사람의 탈을 쓰는 것 정도는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건 절대적 약함은 결국 더욱 크고 사나운 공격을 불러낼 뿐이라는, 나의 오랜 해외 생활이 남긴 깨달음이기도 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본인의 정체성에 대하여 쓰라린 고찰을 하는 사람들에게 진심이 담긴 위로의 말을 건넨다.
당신은 사실 어디에나 속하지만, 그 사실이 고까운 사람들에게 잠시 질투 아닌 질투를 받아내고 있을 뿐이라고. 그러니 본인에게 스스로 아웃라이어(outliers)인지에 대한 가혹한 질문을 던지기 전에,이미 끝도 없이 던져진 돌맹이들을 앞에 두고 자꾸만 움츠러드는 당신 자신을 먼저 토닥여주기를 바란다.
누구보다 한국에 뿌리를 두고 있음에 자랑스러울 테지만,
또 역설적이게도 그로 인해 다른 어느 때보다 가장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당신에게 나는 오늘 또 묻는다.
"당신의 자존감은 안녕하신가요?"
* 커버 사진 출처: CNN article, Why hate crime data can't capture the true scope of anti-Asian violence (url: https://www.cnn.com/2021/03/18/us/hate-crime-reporting-anti-asian-violence/index.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