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을 쓰는 이유
경험을 해보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더 깊이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이 내게 특히 더 그렇다. 좋은 글을 볼 때마다 늘 가슴이 두근거리고, 언젠가 나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다니는 두루뭉술한 생각들을 글로 담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매번 글쓰기와 한바탕 분투한 후에야 마침표를 힘겹게 찍는다. 내용이 길든 짧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다. 그러고 나면 좋은 글을 볼 때 더욱 마음 깊이 경외하게 된다.
이렇듯 쉽지 않은 일인 것을 알면서도 나는 늘 글쓰기에 미련이 있다. 디자인을 잘하고 싶은 마음만큼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커서 가끔은 기한이 있는 숙제를 미뤄두고 있는 것처럼 불편할 때도 있다. 쓰는 것에 이렇게나 강박을 갖고 있다는 것이 웃기기도 하다. 디자이너이면서 작가의 삶을 동경하며 기웃대는 이유가 무엇일까.
글을 쓰기 전에 답해야 할 세 가지 질문이 있다. 왜 쓰는가? 무엇을 쓸 것인가? 누구를 위한 글인가?
- 이다혜,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p. 23
나는 디자인을 할 때 가장 행복한 천상 디자이너라고 믿는 사람이지만, 좋은 디자인을 만나는 것만큼 잘 쓴 글을 소비하는 것이 즐겁고 그런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글쓰기는 내게 있어 디자인하는 것과 비슷한 면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모바일 앱 화면을 디자인한다고 해보자. 제일 먼저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한다. '커머스 서비스에서 사용자가 원하는 상품을 찾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거나 결제를 계속 실패한다' 같은 것들이다. 동시에 이 프로세스를 소비할 대상을 떠올린다. 서비스하고 있는 비즈니스의 상황이나 디바이스 환경, 활용할 수 있는 리소스들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여러 컨텍스트들을 테이블 위에 모두 올려놓는 것이 가장 첫 순서이다.
다음으로 할 일은 반영해야 할 필수 사항들과 제약 조건들을 이리저리 조합해보는 것이다. 테트리스 게임처럼 블록들을 가지고 어울리는 짝을 찾아본다. 그러다 보면 해답이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드러난다. 발명보다는 차라리 발견에 더 가깝다. 운이 좋으면 금방 꼭 맞는 조각을 찾을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세로로 빈자리만 길게 남아서 나머지 공간을 요리조리 애쓰며 채워나가야 한다. 구세주가 될 블록을 기다리면서.
글쓰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글을 쓰기 전에 목적과 소재, 어투, 글이 보일 플랫폼 등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은유와 수사를 조합해서 쓰고 싶은 내용을 만들어나간다. 내가 담고자 했던 내용이 군더더기 없이 표현되었는지 수십 번 곱씹으면서 퇴고를 거듭한다. 몇 번인지도 모를 만큼 지웠다 다시 쓰고, 쓰는 것을 그만두었다가도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다 하고 싶었던 말을 오롯이 표현하는 수사를 찾았을 때, 그때의 희열이 모든 것을 잊게 한다.
이렇듯 디자인과 글쓰기는 많이 닮았다. 결과물을 내기 위한 고민의 과정과 그 대가로 얻을 수 있는 보상의 기쁨 정도까지도 그렇다. 단지 표현의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 요철이 딱 맞는 블록을 만나서 켜켜이 쌓인 줄들을 없애버릴 때의 쾌감이 나를 디자이너로 만들었던 것처럼 계속해서 글을 쓰도록 부추기고 있는 것만 같다.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곧 행동이 된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행동을 바꾸기 위해서는 말을 바꿔야 하고 말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내가 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시각적인 산출물을 통해 끊임없이 상대를 설득해야 한다. 사전적 의미로 설득은 상대편이 나의 이야기를 따르도록 여러 가지로 깨우쳐 말한다는 뜻이다. 나의 편이 아닌 사람을 내 쪽으로 옮겨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논리적인 사고가 필수적이다.
글쓰기는 생각을 잡아두기 좋은 방법이다. 두루뭉술하게 떠다니는 생각들을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표현을 활용한다. 그리고 사용한 수사들이 적절한지 확인해보고 여러 번 고쳐 다듬는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단단해진 생각들이 자연스레 말로 배어 나오고, 습관이 된 말투는 행동으로 드러날 것이라 믿는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하게 '글'을 쓰는 것이었다. 제대로 무언가를 쓰기로 마음을 먹고 왜 글쓰기가 하고 싶었는지 생각해보았다. 우선, 내용을 고민하고 완성해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더 좋은 디자이너가 되고자 하는 과정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한때, 남들과는 다른 경험, 더 많은 경험을 하는 것에 조급해할 때가 있었다. 그것이 나의 경쟁력이라고 굳게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는데, 겪어보는 것만큼 그것을 얼마나 소화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단순하게 많은 양이 질 좋은 하나를 이기지 못할 때도 있다.
글은 그 자체로 결과이면서 과정이기도 하다. 쓰인 글이 읽히는 시점은 일이 일어난 후이지만 내용은 일의 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를 통해 경험을 회고하고 주관적인 의견으로 그 내용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업무를 하면서 배운 사례들,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느꼈던 점들, 그리고 여러 가지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생각한 것들을 글로 정리하면서 경험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를 위한 글이 아닌 스스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이 나 자신에게 조금 더 집중하는 시간이 되도록. 그렇게 사유하는 한 개인의 아카이브로써 이 공간을 만들어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