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긴 했는데…
지난 글에서 둘째를 잠깐 만났다가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운 이별을 했다는 이야기를 썼었다.
그 후 우리 가족은 멀리 유럽으로 여행도 다녀오고 즐겁게 지내며 일상을 보냈고, 남편과 나는 짬짬이 불꽃을 틔우기도 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에는 갑자기 으슬으슬한게 몸이 안 좋고 머리가 어지럽기도 해서 혹시 착상이 된건가? 혼자 증상놀이에 빠지기도 했으나 곧 홍양을 보고는 잠깐 실망을 했었더랬다.
그렇게 일상을 보내던 2025년 1월경, 예정일에 생리가 없었다.
섣불리 기대하지 말아야지...(하면서도 은근 기대가 되기 했지만)
한참을 기다렸다 예정일이 며칠 지난 뒤에야 임신테스트기를 해 보았다.
선명한 두 줄.
오? 드디어??
그래도 아직 어떻게 될 지 모르니 더 기다리자.
네이버로 주수를 계산해 보고는 심장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7주 쯤에 병원을 방문하기로 했다.
이전의 유산 경험과 몇 번의 “임신일까?” 했던 기대와 곧이어 찾아온 실망, 인터넷 정보 속 타인의 이야기 등을 통해 얻은 내적 불안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점점 방어적으로 만들었나보다.
이번에는 최대한 미루고 미뤘다 병원에 가고 싶었다.
설날 연휴가 지난 주중 어느 날,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춰 남편 회사 근처 산부인과를 찾았다. 왠지 지난번 유산을 경험했을 때 갔던 집 근처 산부인과들은 가고 싶지 않았다.
접수를 하고 한참을 기다렸다가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본 초음파.
화면 안에는 한 눈에 봐도 알아볼 수 있는 동그란 아기집이 있었다. 그 안에 자그맣게 보이는 하얀 점 두 개. 하나는 아기고 하나는 난황인가?
심장소리도 쿵쾅쿵쾅 들어보았다.
잘 뛰고 있는걸 확인한 순간 몰려오는 안도감. 남편도 같은 마음일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기집의 크기를 살폈다. 확실히 지난번 보다는 커 보이는 아기집.
선생님도 아기집이 작다, 어떻다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으니 일단은 한 숨 돌렸지만, 그래도 지난 유산의 여파로 불안한 마음이 한 구석에 계속 남아있었다.
흔히 '안정기'라고 말하는 12주까지, 2주마다 있는 진료때마다 초음파를 보기 전 항상 긴장했고, 심장이 잘 뛰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마음이 놓였다.
또한 지난 유산 때 출혈이 있은 후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지며 아기집이 배출되었던 터라, 한 동안은 화장실에 갈 때마다 피가 묻어나오지는 않는지 확인하고 걱정하며 마음을 졸이곤 했다.
이번 임신도 입덧이 별로 없었다. 평소에 비해 소화가 좀 안된다든지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 드는 정도?
기름진 냄새를 참기 힘들어 고기 종류는 땡기지 않는 정도였지, 뭘 먹고서는 구토를 한다든지 뭘 먹지 않으면 울렁거린다든지 하는 심한 종류의 입덧은 아니었다.
예전같으면 “오? 입덧이 별로 없네?? 땡큐!! 운이 좋네~“라며 좋아했겠지만, 불안한 마음이 있는 상태에서는 입덧이 없다는 것도 내 불안함을 가중시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번에는 회사에도 최대한 늦게 알렸다. 임신초기 더욱 조심하며 타인들의 배려를 구하라고 임신초기 단축근무제도를 만들어 놨을터인데, 남들에게 알린 뒤 혹시나 유산되면 그 뒷수습이 민망하고 어색하여 일부러 단축근무제도를 사용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라니.
이렇게 한 번의 유산경험은 나를 저번과는 다르게 행동하도록 만들었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듯 평소처럼 생활했다. 건강한 아기라면 알아서 잘 클거야! 라는 마음으로.
그런데 8주쯤이였나.. 남편, 꿀댕이와 함께 버스를 타고 망원시장을 가는 길에 버스 안에서 혼절을 했다.
하필 차를 안 타고 버스를 탄 날이었는데 말이다.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은가 싶더니 귀가 멍 하고 눈이 노래졌는데, 그 뒤로는 잠깐 기억이 없다.
곧 정신이 들었는데 나는 버스 안의 봉을 잡은 채 뒤로 쓰러져 있고 남편은 계속 나를 흔들며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도 놀라서 웅성거리고 버스기사님이 구급차를 불러줄지 물으셨는데, 조금 있으니 괜찮아지는 것 같아 괜찮다고 말하고 의자에 좀 앉았다가 다음 역에서 내렸다.
그 뒤로도 속이 안 좋고 식은땀이 났는데, 급 변의를 느껴 주변 쇼핑몰 화장실에서 해결을 한 후에야 완전히 괜찮아졌다.
나중에 알고보니 기립성 저혈압인 듯 싶었다.
망원시장을 가려던 걸 포기하고 근처 산부인과를 찾았는데, 다행히 아기는 괜찮았다.
임신초기에 자궁으로 가는 혈액량이 많아 뇌로 가는 혈액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서 그럴 수 있다는 의사선생님 말씀.
집에 있거나 가족이 옆에 있다면 다행이지만, 아까처럼 달리는 버스 안이거나 곁에 누가 없는데 또 전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좀 무서울 것도 같았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건가? 첫째 때는 겪어본 적 없는 경험이었다.
그 뒤로도 출근준비를 하는 중에 같은 증상을 느끼고 연차를 쓰기도 했다.
아휴..둘째 쉽지 않네.
12주가 되었을 때, 나는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좀 찾은 것 같았다.
차츰 초음파 검사가 떨리지 않았고 화장실에 가는 것도 무섭지 않았고, 이제 회사에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때 하필이면! 회사가 중요한 소송에서 패소하고 말았다.
대법원 선고가 그 때 날게 뭐람.
관련 소송들도 줄줄이 패소가 예정되어 있는 상황 앞에(보통 같은 내용의 관련 소송들은 리딩 케이스의 대법원의 판결이 선고되면 그 결론를 따라감), 보직자들은 잔뜩 예민해져서 대응계획을 세우고 과거 행적들을 캐내기 바빴다.
도저히 말 할 타이밍을 잡지 못 해 한참을 뜸들이다가, 이러다간 계속 말하지 못할 것 같아 입밖으로 터져나오듯 얘기했을 때, 역시나 축하한다는 말 대신 마주한건 실장의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하필 이 중요한 시기에 임신이라고?!” 하는듯 한.
내 입장에서는 하필 내가 임신하니 오랫동안 지지부진하던 사건의 선고가 난 것인데, 그들 입장에서는 하필 중요한 선고가 났을 때 내가 임신한 거였을테다.
회사에게 나의 임신은 환영받지 못한 변수였다.
회사의 내 임신에 대한 태도 관련해서는 더 할 얘기가 많은데, 일단 여기서는 이쯤해두고.
암튼 난 이후부터 임신단축근무를 사용했고(이 회사의 몇 안되는 장점 중 하나는 임신기간 내내 2시간의 단축근무가 가능하다는 것), 퇴근 이후에도 업무연락이 종종 오기는 하였으나 한결 편안한 퇴근길을 맞이할 수 있었다.
대망의 성별 공개날이 왔다.
내가 둘째를 고민한 이유 중 하나가 "또 아들을 낳을까봐"였다.
아들도 키워보니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긴 하지만 분출하는 에너지를 감당하기 좀 버거운 면이 없지않아 있고, 아들은 이미 키우고 있으니 딸도 한 번 키워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둘째는 딸이었음 바랐다.
또 요즘 딸이 대세이기도 하고.
딸 얼굴이 궁금하기도 했고, 딸은 크면 친구 같으니깐...나와 엄마 사이를 생각했을 때 나도 나중에 딸이 있음 참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두근두근 기대를 하면서 전화를 받았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간호사분의 목소리.
"니프티 검사 결과 염색체 이상은 없고요, 성별 알려드릴게요. 남자아이입니다~."
"아...네..."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더니,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나만 알고 있다가 나중에 남편에게 젠더리빌을 해 주었는데, 슬로우로 포착한 남편의 표정 변화가 웃겼다.
잠깐 실망하는 기색이 나타났다 곧 애써 환하게 웃음짓는 표정이란.ㅋㅋ
든든한 남자들 사이에서 우아하게 살아갈 수 있길. 쉽지 않겠지만.
그러던 어느 날, 지방에 중요재판이 있어 참관하러 간 날이었다.
ITX를 타고 춘천까지 갔다가 법원까지 꽤 되는 거리를 걸어서 왕복하고, 외부로펌 변호사님들이랑 회사 사람들이랑 소송 관련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신경도 좀 써서 그런지,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에서 배가 반복적으로 뭉쳤다.
10분 간격으로 배가 뭉치면서 약간의 통증도 동반되었다.
아직 25주밖에 안됐는데…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느낌에 걱정이 되어 퇴근하는 남편에게 얘기하고 남편과 만나 곧장 병원으로 갔다.
분만실로 가 내 증상을 말했더니 간호사분이 수축여부를 검사하는 벨트 같은 것을 내 배에 채웠다.
한참 시간이 흘렀을까...
당직인 의사선생님이 오셔서 수축이 얼마나 자주 있는지를 확인하고 자궁경부 길이도 쟀는데, 수축이 확실히 자주 반복적으로 있는 것은 맞지만 자궁경부가 벌어졌다거나 아주 짧아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지금 당장 아기가 나올 위험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여져서 일단 약을 처방해 줄 테니 집으로 가서 안정을 취하고 며칠 뒤면 정기검진이니까 그 때 주치의 선생님이 상태를 보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주셨다.
그래도 아주 위급한 상황은 아니라니 마음이 놓였지만, 첫째 때는 경험해 보지 않은 자궁 수축 이벤트는 또 내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집에 가서도 새벽 내내 반복적인 수축이 느껴졌고, 걱정스런 마음으로 잠에서 깼다.
인터넷을 찾아보며 나와 같은 증상을 겪은 산모들의 블로그를 보았는데, 잠깐 그러다가 괜찮아진 경우도 있었고 근종통이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입원해서 약물 치료를 받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계속 걱정하는 마음으로 출근 여부를 고민하다가, 오전에는 반차를 내고 쉬고 점점 괜찮아지는 것 같아 오후에 출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로는 다행히 통증을 동반한 반복적인 수축은 없었지만, 또 그러지는 않을까 불안한 마음은 한참동안 지속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간 정기검진에서 주치의 선생님으로부터 자궁경부가 조금 짧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5cm부터 위험한 것으로 보는데 지금 2.6cm라고. 경계에 있다고.
저번 자궁수축 이벤트때매 그런걸까? 다음 주에 태교여행이 계획되어 있는데...
하지만 선생님은 첫째 때 별다른 조산이슈 없이 정상분만을 했고 지금도 아주 위험한 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약을 처방할 필요는 없고, 정 원한다면 산모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질정을 처방해 줄 수는 있다고 하셨다.
여행은,, 좀 우려된다는 늬앙스를 풍기셨지만...
너무 위험한 케이스를 많이 보는 대학병원이라 이 정도는 귀여운 수준인걸까?
걱정은 되었지만 일단 질정과 혹시나 비행기표를 취소할 상황에 대비한 소견서를 받아 나왔다.
그리고 최대한 출퇴근을 제외하면 집에서 누워있으려 했고 회사 일로 스트레스 받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노력한다고 맘대로 되는 건 아니겠지만).
아휴, 둘째는 이벤트도 많네.
이쯤되니 아무 이슈도 없었던 첫째 임신이 엄청난 복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이벤트를 겪으며 그 때마다 인터넷이나 유투브를 찾아보고 여러 케이스를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생각보다 임신 중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우려스러운 일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임산부들은 아무래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임신 기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경험하지 않으면 진짜 모른다.
그래도 시간이 흘러 어느덧 30주차를 넘어서고 있다.
남은 두 달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무사히 둘째를 만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