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우리에게 차가운 시선과 침묵을 보낼 때
*본 영화는 브런치 무비 패스로 개봉 전 시사 관람하였습니다. 쌀람훼요 브런치......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많이 있습니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이라는 프랑스 영화를 보러 갈 거라고 했더니, 직장 동료가 "와, 재미있겠다. 프랑스 남자 배우들 몸도 나오고!"라고 했다.
아, 그게......
수영장으로 간 중년 아저씨들 얘기야.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Sink or Swim, Le grand bain)]
"세상이 우리에게 차가운 시선과 침묵을 보낼 때"
2년째 백수 생활 중이다. 딸은 캠핑카 불법주차를 해가며 노상 생활을 하는 아빠를 창피해하면서 "아빠는 데이비드 보위가 아니야"라고 말한다. 아들은 말을 더듬는다. 가정의 문제와 대화 부족이 원인이라고 한다. 운영하는 수영장은 파산 직전이다. 한창 유망주였던 시절, 파트너가 사고를 당했다.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건 파트너인데 나도 원망이 깊고 충격이 커 괜찮으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나만 생각했던 것 같다.
이들은 그래서 수영장으로 갔다. 인생 중반, 젊은 시절부터 차곡차곡 적립해온 위기요소가 마침내 곪아 터져 버린 것 마냥 하루하루가 생사의 줄타기인 이 아저씨들은 수중발레 강사 델핀과 함께 수중발레팀 활동을 시작한다. 발레팀은 언짢은 신체를 하고 수구대회의 오픈 전 노인 우대처럼 펼쳐지는 오프닝 행사 등에서 시답잖게 활동한다. 수구를 보러 온 관객들은 늙은 아저씨들의 애처로운 허우적거림에 의아한 시선과 차가운 침묵을 보낸다. 길을 가다 마주쳐도 기억나지 않을 것처럼 평범하거나 평범하기도 어려워 허덕이는 이 중년의 남자들의 삶을 축약한 것 같은 첫 오프닝 무대였다.
멤버들에게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읽어주고, 힘들 때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를 내어주는 델핀. 함께 페어로 수중발레를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델핀과 등지게 된 파트너 아만다는 어느 날 델핀의 유부남 애인이 수영장으로 찾아와 델핀에게 막말을 퍼부은 후, 수영장에 나오지 않게 된 델핀을 대신하여 지옥의 스파르타 훈련을 시작한다. 그건 둘 사이의 말 없는 화해였을지도 모른다.
"선생 죽여 버리고 싶어." 홧김에 휠체어에 탄 아만다를 로랑이 풀장으로 밀어버리면서 팀의 훈련은 비로소 활기를 띤다. 델핀도 돌아오고, 팀원들은 끈끈한 유대와 의지를 갖는다.
"이대로 가라앉거나, 헤엄치거나"
Sink or swim-
프랑스 원문 제목도 좋지만, 영문 제목이 이 영화의 주제를 잘 축약해서 나타낸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은 풀에 던져진 것만 같은 인생. 막막하다. 세상은 나에게 차가운 시선과 침묵을 보낸다. 비난보다 두려운 침묵과 무관심이다. 너무 많은 것을 망쳐버린 건 아닐까,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닐까. 이 중년 아저씨들의 사십춘기, 오십춘기가 열 다섯 소년의 사춘기와 다른 건, 이대로 정말 삶이 끝나거나 가족과 헤어져 길바닥에 나앉을 수도 있는 생사의 위기에 매일 노출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 영화 너무 우울한 건 아닐까, 싶겠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유머러스하다. 잔혹할 정도로 신랄하고 유머러스한데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혜성...... 혜성이 생각나. 혜성이 오색 빛을 발하다가...... 추락해서 매형의 BMW를 박살 냈으면 좋겠어!" 와이프 언니의 재수 없는 남편과 벼르고 벼르다 시원하게 주먹다짐을 하거나, 하루동일 닦이면서 운동하다가 선생의 휠체어를 풀장으로 밀어버린다든가 하는 잔혹함이 많다.
프랑스 영화답게, 아 저 비장한 부분은 생략하거나 덜어냈으면 좋았을걸, 하는 사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개취) 적절하게 웃기고 적절하게 쿨하다. 울고 짜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않기 때문에 보기가 마음 편하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쿨한 시선을 유지하는 가운데, 프랑스 사람들 특유의 시끄럽고 잔혹하고, 겉으로는 시크한 척하면서 잔정과 사족 많아 보이는 태도들을 잊지 않는다.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기 때문에 이들이 하필이면 왜 수영장에 와서, 왜 하필이면 여성의 전유물처럼도 생각되는 수중 발레를 하는 것인지에 대한 큰 설명이 없는 것은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누구에겐들 그렇게 큰 의지와 목적이 있겠는가. 흘러 흘러 그렇게 되는 것이 삶과 더 닮았다. 호스피스 시설에서 간병 일을 하면서, 노인병동 특유의 '죽음의 냄새', '노인 냄새'를 맡고 싶지 않아 매 방을 들어갈 때마다 숨을 참았다는 존(펠릭스 모아티 배우, 이 영화에서 유일한 현재 진행형 미남이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수중 발레에는 '받침대'역할이 필수적인데, 이 역할을 맡은 사람은 숨을 가장 오래 참으며 중심부에서 다른 팀원이 물 밖에서 연기하는 동안 서포트를 해야 한다. 물속에서 1분도 버티지 못하는 폐활량의 아저씨들은 받침대를 수소문하고, 마침 로랑의 어머니가 존이 일하는 시설에 입원했었던 바람에 존은 우연히 팀의 받침대로 영입된다. 결과를 생각하지 못하고 우연히 매일 해온 어떤 것, 인생은 그런 것이 빛을 발하는 형태로 보통 흘러가지 않던가? 죽을힘을 쓰고 공을 들인 것은 자주 무너져 내리더라도 말이다.
영화는 전형적인 듯 전형적이지 않은 전개로, 결국 이들이 출전하는 올림픽 무대를 보여주며 마지막으로 향해 간다. 오합지졸들의 저질 몸과 허우적대는 모습을 익히 봐온 관객들은 영화 속 등장인물의 긴장과 심호흡의 호흡을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개최국인 노르웨이의 노련함, 뭐든지 잘하는 일본팀, 자국의 제품들처럼 품질 좋고 칼 같은 독일팀을 차례로 지켜보면서, 이들이 어떤 망신을 당할까, 어떤 식으로 정신승리를 획득할까, 아니면 어떤 요소로 관객들에게 감동적인 포인트를 어필해서 실력 대신 회자될 거리를 만들까, 그런 상상을 하게 만든다. 이들은 앞선 팀들의 일사불란함과 스킬을 도무지 따라갈 수 없으니 음악과 조명으로 승부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영화의 신의 한 수는 이 대목이다.
왜 이렇게 잘해! 이렇게 잘했는데 숨기고 있었어?
아만다와 지옥 훈련을 하는 동안 이들은 엄청난 기량 향상 중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오합지졸들이 허우적거리는 모습만 보여주고, 아끼고 아끼다가 보여주는 실력으로 관객을 놀라게 만든다. 누군가는 비현실적이라고 할 테지만 나는 이 부분이 영화에서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한다. 모든 관객이 한 마음으로 응원하고, 통쾌함을 느꼈을 테니까. 팀워크, 무대매너, 일사불란함, 칼 같은 기술, 음악과 조명, 의지. 그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무대를 보여준 프랑스 팀은 관객으로부터 기립박수를 받는다. 금메달도 딴다.
"이 불확실함 가득한 세상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네모는 동그라미 안에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 것.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시작하던 영화. 아재들의 프랑스팀은 공연 중에 네모와 동그라미를 그려낸다.
마지막에 "동그라미도 계속 시도하다 보면 네모에 들어갈 수 있고,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사족을 굳이 말로 달면서 끝나기는 하지만, 영화는 (내가 이해하기론) 어려운 상황을 직면하고 무조건 노력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냥 너만 그런 거 아니라고, 사십춘기는 너만 겪는 게 아니고 사람은 다 그래. 너만 지질하고 옹졸한 거 아니야. 우린 다 이런 존재야. 이렇게 막 나가도 돼. 하고 싶은 거 해.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고 위로하는 듯하다. 우연히 중년의 위기를 겪는 남자들이 수영장으로 흘러 흘러가서 색다른 영감을 받았듯,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으니 너무 다 놓아버리지 말아라.라고 하는 듯하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초-한 남자>에서 말한다. 부모들이 요즘 아이들이 해보고 싶다는 것을 다 해주면서 격려하고 키우는 것이, 구세대들이 보면 눈살을 찌푸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과거와 달리 개인이 똑똑한 것이 살아가는 데 큰 메리트가 되지 않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정보는 널려있고, 창의적 사고를 통해 정보와 정보를 연결하거나 긍정적인 태도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며 소통하는 능력이 중요해진 세상이기 때문에 인류가 직관적으로 그에 걸맞은 육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사람은 누구나 어릴 때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자라면서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은 소멸되고, 마흔이 가까워지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생겼다가 남아있는 자기 연민마저도 소멸하게 된다. 부모님이 어린 시절 관심과 사랑을 듬뿍 줄수록 자라서 세상의 차가운 무관심을 좀 더 오래 견딜 수 있게 된다.
인간수명이 갑자기 길어지자 방황기도 길어졌다. 영화 속 중년의 아재들은 사십춘기까지 도달하는 동안 어린 시절 듬뿍 받았던 사랑을 다 썼을 수도 있고, 어릴 때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더 이상 자신이 특별하지 않음을 깨달아버린 데다 그것에 슬퍼하는 일조차 허세라고 느껴질 때, 이들은 그래서 수영장으로 갔다. 상처 받은 이들이 손을 잡고 연결하여 그린 네모와 동그라미는 더욱 특별하다. 서로 어떻게 잡고 연결하느냐에 따라 이들은 네모도 동그라미도 될 수 있었다. 중년에 도달하도록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아서 불안한 미래였지만, 네모와 동그라미로 확정돼 버린 내일 또한 아니기에 다시 내일을 그리며 살 용기를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