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이야기
“나를 너무 꽉 끌어안는 사람, 나를 너무 깊이 상처 주는 사람, 내 의자에 앉아 내 잠을 방해하는 사람. 나를 너무 필요로 하는 사람, 나를 너무 잘 아는 사람, 나를 너무 가까이 당기는 사람.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는 사람 그리고, 살아가게 해주는 사람.”
-Being Alive(Glee)
삶이 죽음을 완성하고 죽음이 삶을 완성하듯, 사랑했던 두 사람의 관계를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것은 이별의 단계다. 결혼이라는 서사는 이혼이나 백년해로한 뒤의 죽음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두 사람이 법적으로 이별하는 이혼의 과정을 다루지만 <결혼 이야기>이다.
"[결혼]: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중에서)
우리는 싫은 것에도, 좋은 것에도 금세 익숙해지도록 설계되었다. 언제까지나 처음처럼 놀랍도록 사랑스러운 사람도, 언제까지나 똑같은 강도로 가슴을 찢어 발기는 고통도 없다. 이번만큼은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의 환희와 상대에 대한 설렘은 어느덧 당연한 풍경과 무심한 습관으로 변해버린다. 반했던 부분들은 평소 존재를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당연해지거나 도리어 짜증을 유발하는 요소로 변하게 되고, 서로 달라 맞지 않던 부분은 처음에는 매력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평행선만을 그리게 된다. 서로 자신을 깎아 맞춰 내었던 아름다운 퍼즐은 시간이 지나 깎아낸 자리에서 새 살이 돋으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도저히 맞출 수 없는 퍼즐 조각처럼 겉돈다.
찰리를 처음 만났을 때에 대해 이야기하는 니콜. 두 사람의 대화는 영혼의 짝처럼 잘 통했고 끊일 줄 몰랐다.
아침에 눈 뜰 때마다 세상이 핑크빛으로 보일만큼 깊던 사랑이었다 하더라도, 사람은 그 환희에 적응하고 그 사람이 주는 자극에 점점 높은 역치를 갖게 되도록 설계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생활의 때를 입으면 사랑은 치사하게 변해버린다. 반질 반질 윤기 나는 새 것의 상태보다 보풀이 인 채 입는 기간이 더 긴 겨울옷처럼, 삶과 사랑에는 완벽하게 행복한 시간보다 고통받는 시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잘 맞는 사람을 서로 대등하게 사랑해도 수년이 지나면 마음이 바래는데,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맞추고 포기하다가 사랑이 빛바랜 후 남을 미움. 미움과 원망과 배신감과 프라이빗한 감정들이 까발려져 남의 입에 아무렇지 않게 손해라는 이름으로 숫자 나열되듯 오르내릴 때 느껴질 허무함. 사랑도 미움도 숫자가 되어 버리는 얄궂은 법정의 이별.
아이의 핼러윈 코스튬 실랑이 하나에서도 드러나는 두 사람의 관계. 네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절규하는 파국. 금이 간 관계는 대개의 경우 이어 붙일 수 없고, 이어 붙이더라도 똑같은 상처를 남긴다. 사랑은 삶의 보풀과 결국 동떨어질 수 없어 내 모든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과 무엇을 내어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언쟁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미국 영화 속 부부의 이혼은 너무 점잖다고, 주변의 모든 유경험자들은 말한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가장 신선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처럼, 누군가는 그 사람과 이별 직후가 그 사람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그리워할 때라고도 말할 것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유한성이 주는 아픔과 추억의 영원한 단절 때문인가. 한정된 장소에서 롱테이크로 싸우며 관객마저 가쁜 숨을 쉬게 만들던 찰리와 니콜의 격렬한 싸움은 결국 끝난다. 한때 사랑했던 모든 커플은 변한다. 관계와 감정이란 그 상태로 그대로 있지 못하다. 계속해서 사이가 좋은 커플이라고 해도 그 관계는 끊임없이 다른 형태로 변하고, 많은 경우 좋은 감정은 무심한 마음이나 나쁜 감정으로 변질되곤 한다.
그러나 사랑했던 사람만이, 자신의 살이 깎여 나갈 만큼 고통스럽게 상대를 미워할 수 있다. 누가 우리를 그렇게까지 화나게 할 수 있는가. 누구에게 우리가,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이렇게까지 화를 낼 수 있는가. 입 밖으로 내는 도중 그 누구의 마음보다 다름아닌 내 마음을, 가장 아프게 뜯어내고 상처 받게 만드는 말을 던지면서.
자녀를 둔 커플은 그들의 관계가 다 한 후라고 해도 아이로 연결된다. 시간이 흐르고 격한 감정은 조금 넣어둔 채 다시 만나는 두 사람의 건조하고 덤덤한 모습 덕에 조금 편하게 영화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모습이 더 아픈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우리. 진심을 다하여 사랑했지만 언젠가 끝이 날 모든 관계. 가장 격렬하게 사랑했던 사람과 끝까지 행복할 확률이 가장 높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내가 가장 잘 내려놓을 수 있는 상대와 가장 평화롭게 오래 지낼 확률이 더 높을지도 모른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니까. 잘못은 삶이 아닌 예술에 있다. 실제와 동떨어져 우리에게 사랑에 대해 과도한 기대치를 부여하는 영화들처럼. 우리의 사랑은 완벽한 이해와 해피엔딩을 약속하지 않는다.
이 영화, <결혼 이야기>조차 실제보다 점잖고 아름답지만, 기한을 다한 사랑의 모습에 대해 좀 더 "삶"에 밀착하여 생각하게 해준 흔치 않은 "예술".
"낭만주의 결혼관은 '알맞은'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허다한 관심사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는 것으로 인식된다. 장기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너무 다양하고 특이하다.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중략)
대부분의 러브 스토리를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 자신의 실제 관계는 거의 다 하자가 있고 불만족스럽다. 많은 경우 별거와 이혼이 불가피해 보이는 것도 놀랍지 않다. 그러나 우리를 자주 잘못 인도하는 미적 매체들이 부과한 기대에 따라 우리의 관계를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잘못은 삶이 아닌 예술에 있다. 불화를 일으키기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보다 정확한 이야기들을 들려줄 필요가 있다. 시작에만 너무 얽매여 있지 않은 이야기, 완벽한 이해를 약속하지 않는 이야기, 우리의 문제를 정상적인 것으로 되돌려놓고 사랑의 여정에서 거쳐 갈 길이 우울하더라도 희망적임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