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
“I can’t believe childhood is over.”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꽃을 따던 애틋한 유년은 썰물처럼 멀어진다. 유년이 아프지 않고 마냥 행복했다기보다는 어른의 시점으로 그때의 고통을 지금 회상하며 바라보기 때문에, 어린 마음에는 돌덩이 같았던 일들도 작게 보이는 것이겠지.
어른 된 우리에게 세상 일은 여전히 하나도 예측대로 되지 않는다. 형편은 나아지지 않고 가족을 이른 때 떠나보내고 일생의 사랑을 눈 앞에서 믿을 수 없이 아프게 놓치고, 넘을 수 없는 제도의 벽도 버겁고. 도저히 해가 지기 전에 풀 수 없는 화와 슬픔은 세상에 너무 많다.
영원히 너만 사랑하겠다는 허무한 약속 대신 묵묵히 이 땅에 매년 어김없이 피는 꽃처럼, 유년에 한 해 한 해 일궈온 나의 건강함으로 묵묵히 나아간다.
새 사랑을 만나고 유년을 함께 보낸 사람들과 조금 깊어진 주름을 얼굴에 그으며 마주 웃고. 슬픔보다 중요한 건 슬픔을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해 지기 전에 화를 푸는 거야. 나도 거의 매일 화가 나는걸. 분노에 내 좋은 면이 잠식되지 않게. 어떤 천성들은 억누르기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높단다."
올코트의 소설에는 거의 모든 여자 아이의 삶이 들어있다. 플래시백 형태로 진행되는 영화에서 성인이 된 자매는 인생의 유의미한 사건을 만날 때마다 유년을 회상한다. 글 쓰는 일에 집중하느라 불이 붙는 치마, 첫 사교계 데뷔를 앞두고 태워버린 언니의 머리카락.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다 깜빡 잠들고 맞은 아침 식탁에 기적처럼 감사하게 앉아있던 여동생의 모습을 회상하다 현재로 돌아와 눈을 뜨자 두 번 일어나지 않았던 기적. 소녀에서 엄마가 되기까지의 인생과 그녀를 둘러싼 가족, 사랑, 행복, 상실과 이별, 그 모든 것.
격변의 시대, 베스에서 시작해서 조가 되었을 많은 여자 아이들의 등을 따뜻하게 다독이는 영화.
시대와 제도 속에서 원작자 올코트가 현실적으로 타협하여 조에 투영했을 자신의 모습. 그레타 거윅은 그 결말을 시대에 맞게 바꾸면서도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마지막, 조가 로맨틱한 사랑을 이루는 모습은 소설 속의 모습일 수도 있게 묘사된다.
여자든 남자든 행복의 시작은 결혼이 아니며, 사랑의 행복한 결말도 단지 결혼인 것은 아닐 것이다. 결혼은 하나의 과정이거나 개인의 선택이라는 메시지. 그와 똑같이 중요한 메시지는 후에 메그를 통해 나온다.
“재능은 천재성이 아니야. 제대로 못할 바엔 안 하는 게 낫지.”
“네 어머니의 딸이 하는 말치곤 이상하다.”
라임 따위 가지고 허세 부리고, 자기가 잘못해서 쥐어터지고 물에 빠지면서 징징거리고, 언니의 분신과도 같은 원고를 불살라버리는 에이미는 많은 여자 아이들이 소설로 접하던 어린 시절부터 얄미워하던 존재인데, 영화는 그런 에이미에게도 매력과 정당성을 풍부하게 부여한다. 플로렌스 퓨가 연기한 에이미의 낮고 야무진 음성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단단하게 성장하는 모습은 더 이상 에이미를 미워할 수 없게 한다.
영화 초반에 엠마 왓슨이 왜 이렇게 시시한 역할을 맡았을까 의문을 갖기 쉬운데, 사실 엠마 왓슨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를 담당하고 있다. 그레타 거윅은, 현대에 흔히 시시하다는 듯 평가절하되는 당연한 행복추구와 역차별당하기 쉬운 여성성에 대해서까지 세심하게 배려한다. “네 꿈과 내 꿈이 다르다고 해서 내 꿈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 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라는 메그의 말.
"우리가 이 땅을 이토록 사랑하는 건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기 때문이며,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따던 그 꽃들이 봄마다 이 땅에서 다시 피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모든 것이 자명하고 자명하기에 사랑받는 이 달콤한 단조로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