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이질적 존재에게 받는 위로
렛미인(Let me in / 2008 / 스웨덴)
연출: 토마스 알프레드슨
고통만을 주는 동질적 존재들 틈에서, 가장 이질적 존재에게로의 도망.
"나를 들여보내 줘."
나중에 헐리웃에서 클로이 모레츠 주연으로 리메이크된 렛미인도 나쁘지 않았지만 스웨덴 렛미인이 나는 더 좋았다. 지독한 북유럽 추위 속 창백한 아이들, 백금발 눈썹, 길쭉하게 마른 다리, 아름답지만 지루한 일상이 된 반짝반짝 설경, 눈을 밟는 뽀드득 소리와 바람소리, 뽀얀 입김. 눈 쌓인 고즈넉한 북유럽 배경은 예쁘기도 하지만 오스칼의 외로움과 고립감을 부각하기도 한다.
무리 속에서 만만한(정확히는 만만"해 보이는") 대상을 어른들보다도 빨리 알아보고 괴롭히는 동물같은 아이들, 알면서도 방치하는 눈치의 학교 선생님들, 사랑해주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야단만 치는 평범한 엄마와, 열 두살 아들 앞에서 남자 애인과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게이 아빠,
오스칼이 이들로부터 떨어져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나눌 대상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낯선 존재, 뱀파이어 이엘리였다.
"잘 들어, 오스칼, 다음번엔 너도 받아쳐."
타자에게 나를 있는 그대로 설명할 방법은 없다. 누구나 자기가 가진 각기 다른 경험과 가치관의 필터를 통해서 상대를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모든 행동의 사유와 자신의 특성을 일일이 설명할 시간도 없다. 그리고 내가 인식하는 나 자신도 100% 객관적인 나라고 보긴 어렵다. 진심의 일부만 전해서 왜곡되느니 겉도는 대화만 하고 필요한 화제가 통하는 사람과 그때 그때 기대없이 소통하며 사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스칼처럼 하루하루가 외로움과 싸우는 고통이라면?
가까운 사람들이 도리어 나를 더 모르거나 왜곡하는 경우도 많고, 어차피 애인 외 누군가와는 100% 온전한 소통이 불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가끔 아예 모르는 낯선 존재가 설명한 적도 없는 감정을 전적으로 공감해주는 경우는 있다. 실제로 나는 스쳐지나는 아예 낯선 사람에게서 짧은 위안을 받은 적이 많았던 것 같다.
매우 낯선 이질적 존재이지만(심지어 성별도, 겉으로는 여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 수 없는......) 아무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오스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껴주는 이엘리.
일본의 인기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드라마 "하얀 거탑"에서 장준혁은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천재외과의사이다. 누구나 욕은 할지언정 그 자아의 가장 큰 부분을 형성하는 업무적 재능만은 인정해준다. 누구나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설명이 필요없는 부분을, 장준혁은 유일하게 친구라 여기는 이선균에게는 늘 재확인 받고 칭찬 받고 싶어한다. "나 이번에도 000수술 최초로 성공했어. 잘했지?" 많은 이들의 찬사 속에 늘 당연스레 도도했던 장주녁이 인정받고 싶은 상대인 이선균에게만큼은 자꾸만 실력을 재확인받고 싶어했듯이, 우리는 정말 우리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100%이해를 바라므로, 오히려 더 서툰 몸짓으로 뜻을 전하곤 한다. 지나친 기대를 걸기 때문에 거기에서 소통이 어긋나고 외로움이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가장 옆에 두고 싶은 사람은, 가장 인정받고 싶은 면이 부각된 모습으로, 스스로 인식하는 나 자신의 모습과 가장 흡사하게 나를 보아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영화 속에서도 이엘리가 오스칼 자신의 내면인 것처럼 묘사되는 부분이 있다. 오스칼이 외로운 하루하루 속에서 '사람의 피를 먹고 사는 무성의 뱀파이어'라는 가상적 존재를 상상하며 만들어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 처럼.
결말 역시 다소 열린 결말이나, 나는 아름답고 슬픈 결말로 해석했다.
가장 사랑하는 영화 중 하나가 "판의 미로"인데, 전혀 다른 분위기지만 슬프고 아름다운 잔혹동화같은 영화라서 연상되었다. 다시 봐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