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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Jan 24. 2023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 너에게 가고 있어, 유년시절

<더 퍼스트 슬램덩크>, 추억팔이에 그치지 않은 멋진 재해석


이 세상 모든 만화가는 천재입니다. 흰 종이 위, 단지 검은 선만으로도 한 세상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상상을 자유자재의 앵글, 풍부한 캐릭터로 표현하면서 사람의 감정을 뒤흔듭니다. 여기에는 색도 BGM도 없지만, 오히려 우리는 어떤 매체를 접할 때보다 만화책을 읽을 때 뇌를 가장 많이 쓰면서 진심으로 몰입합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 같은 천재작가는 컷 크기 조절만으로도 읽는 사람의 뇌에 강약의 충격을 가합니다. 흑백의 펜선과 컷 크기만으로 사람의 감정을 흔드는 직업은 얼마나 매력적인가요.


채워지지 않은 그 색과 여백을 가지고 VR보다 더 생생하게 코트 안의 땀냄새를 맡으며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상상의 여지를 내어주는 여백이 좋아서 흑백의 선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종이 만화책을 좋아합니다. 빨간 머리 원숭이라고 하는 강백호의 머리색은 사실 무수한 점으로 구성된 스크린톤으로 채워진 회색빛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억 속의 그는 적발이니까요.


우리 어렸을 때 만화책 속 주인공은 머리가 흑발(먹색으로 채색)이냐 백발(아무 채색이 없이 결로만 표현됨)이냐 금발(간헐적 빗금으로 표현됨)이냐에 따라 구분했습니다. 얼굴이 다 똑같이 생겼으니까요. 저는 이게 참 아쉬웠는데요, (누군가는 그게 뭐라고, 하고 하겠지만) 그러던 와중 슬램덩크를 만난 건 저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등장인물의 얼굴이 전부 다 다르게 생겼었으니까요. 실제 세상의 사람처럼 모든 등장인물의 눈썹, 쌍꺼풀 라인, 얼굴형, 어깨선, 팔 길이, 입술, 모든 것이 다 달랐습니다. 게다가 멈춰있는 단면의 그림들에서는 스피드와 긴박감, 땀냄새까지 전해질 것 같았습니다. 천재작가의 등장이었습니다.  


작가가 슬램덩크를 그려낸 건 생각보다 놀랍도록 젊은 시절이었네요. 이제는 당연히 할아버지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노인이 돼서도 저렇게 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는 부분에 놀랐었는데요. 놀랍게도 천재작가답게 슬램덩크는 작가가 20대 때 연재했던 작품입니다. 세상에 26년이 흐른 지금, 아직 작가는 50대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 이쯤 되면 스스로를 천재라고 칭했던 강백호(겸허함이 미덕으로 간주되던 시대라서 이것조차 신기한 일이었습니다)처럼 작가도 스스로를 천재라 여기지 않았을까요?



Z세대가 슬램덩크에 흥미가 없다며, 우리는 이 위대한 원작을 어린 시절에 읽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냐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슬램덩크는 사실 당연히 세대를 넘어 지금도 폭넓게 사랑받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이제는 흰 종이에 검은 펜선으로 그려진 종이 만화책을 시간들여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기가 어려운 것뿐이겠지요. 자리에 진득하게 앉아 아무 영상도 음악도 재생하지 않은 채 종이 만화책을 본 경험, 가장 최근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잖아요. 우리는 너무 다양한 소리와 움직임의 자극 속에 살고 있습니다. 잠시도 뇌가 무언가를 더 상상하고 그려낼 여백은 보이지 않아요.


어린 시절 소년만화를 좋아했던 사람, 아직도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다는 게 지론입니다. 소년만화와 드라마, 영화 속 주인공들은 자신이 아픈 것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자신의 노력을 생색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베푼 호의를 제입으로 말하지 않잖아요. 그런 태도를 멋지다고 여기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이라도 하는 거 자체가, 변명과 남 탓과 여우짓으로 점철되지 않으면 순식간에 눈탱이 맞기 쉬운 현대사회 회사원에게는 너무 사랑스럽잖아요.'잃어버린 나', '진짜 나' '나 다운 나' 같은 느낌?


천둥벌거숭이가 성장하는 스토리를 우리는 좋아했습니다. 성장 포텐셜이 가득하지만 자기 앞가림은 못하는 천재가 어느 날 각성하는 스토리는 동경할만한 이야기죠.

가진 게 없는데 단 하나의 재능과 악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라고 하면 실제 슬램덩크 분위기와는 많이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그 시절 우리는 '허리가 아프고 내일이 어찌 될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후회 없는 최선이 중요한 영웅'을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나에겐 지금이 중요해. 인생 1회 차인데 뒤는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이 감정에 최선을 다하자.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작가는 그렇게 강백호 인생 최고의 순간을 그려냈습니다.


인생의 서사는 자기 기억이 편집하기 나름입니다. 북산 5인방은 결과적으로는 졌습니다. 그리고 강백호나 서태웅이 그 뒤로 프로 생활을 이어갔을지 어땠을지 모릅니다. 고등학생인 그들 최고의 순간이 우리에게는 크게 그려져 기억에 남았던 것뿐이죠. 우리는 우리 인생의 어떤 순간에 컷 크기와 분량을 크게 할애할까요. 지나고 보면 결과적으로 허무한 결말로 남을 사건이라도, 우리는 이노우에의 오래된 펜선이 잠시 두 시간 동안 3D로 살아나 움직였듯 현재의 관점에서 우리의 어떤 순간을 꺼내 기억하고, 큰 컷을 내어주고, 함께 그 시간을 겪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겠죠.  


슬램덩크의 오프닝과 엔딩은 그래서 완벽했습니다. 흑과 백으로 멈춰있던 단면의 캐릭터가 3D 컬러로 살아나서 움직이다가 마지막 송태섭의 포효와 함께 펜선으로 되돌아가니까요, 좋은 기억을 꺼내 다시 눈앞에서 돌려보다가 다시 곱게 앨범과 서랍 안에 넣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천재작가는 영화라는 매체가 갖고 있는 모든 특징을 활용해 보는 이에게 감정을 움직이게 하는 도구로 씁니다. 이 영화가 상영되는 상영관에는 관크가 없습니다. 승부의 순간들에 흐르는 숨막히는 정적, 상영관 안에는 숨소리나 코 훌쩍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서구권의 그래픽노블과 동양권만화의 차이를 보면, 저쪽은 색과 면으로 사물을 인식한다는 느낌이 강하고, 우리 쪽은 선으로 인식한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만화로 되살아난 슬램덩크 인물들의 무빙이나 채색은 우리 식으로 완벽합니다.

펜과 선이 살아나서 VR 경기장처럼 움직이는데, 펜선의 미덕이나 캐릭터 생김은 거의 훼손되지 않고, 채색도 사실은 풀컬러인데 마치 2도 인쇄(빨강, 검정의) 느낌으로 담백하게 느껴집니다.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는 예전 TV 시리즈 슬램덩크를 지금 와서 보면 지금 견디기는 힘든 퀄리티이기는 한데요, 사용한 클립의 엄청난 재활용 반복이라든가, 배경이 다 생략되고 효과선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기장면들이라든가, 현실적으로 너무 만화 같은 점프거리라든가, 과장된 연기라든가, 못생겨진 윤대협이라든가, 멈춰있는 배경이라든가, 당시에도 만화책보다 훨씬 못하다고 생각하면서 보기는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20여 년 전에 작가는 사실, 이렇게 하고 싶었구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특히 더 좋았던 이유는, 이 영화가 그 시절 "최고의 순간"을 재생산하여 되파는 추억팔이로 그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완벽한 서사로 마무리된 서사에 수십 년을 손대지 않았던 작가를 믿었는데, 그 믿음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미 너무 많이 회자되어 버린 정대만의 "농구가 하고 싶어요......"나 "왼손은 거들뿐"같은 너무 유명한 명대사들을 생략할 줄 아는 담백함이 아니었다면 슬램덩크는 추억팔이에 그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좋죠.)

원작의 오랜 팬들에게는 이러한 정대만 서사의 생략이나 명장면의 생략이 어쩌면 아쉬운 부분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가 자신이 만들어낸 명대사나 명장면에 취해 그걸 몇 년 동안 재탕하고 잊지 못하는 모습이야말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대신 강백호가 드디어 패스를 잡고 마지막 비저비터를 완성한 뒤 서태웅과 나누는 하이파이브는 다른 관점으로 보면서 더 감동이 짙어졌습니다. 추억팔이에 그치지 않은 멋진 재해석! 작가가 옮아간 미디어의 특징을 너무 잘 활용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원작보다 그 슛을 완성하기까지의 빌드업이 더 강해졌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송태섭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극에서도 시선을 스틸하는 강백호의 존재감은 너무너무 귀엽습니다. 원래 무서운 애들이 제일 귀엽잖아요?



자기 콘텐츠에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 변형 재생산에 민감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건 어떻게 보면 굉장히 많은 경제적 이익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고 모니터를 쉴 수 없는 번거로운 부분이기 때문에, 강렬한 자부심과 일종의 책임감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작가는 본인이 그려낸 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올곧은 사람, 농구밖에 모르는 바보인 서태웅처럼 자기 작품 밖에 모르는 바보였나 봅니다.


슬램덩크는 사실 그때도 판타지였죠. 최소 187,8cm, 2미터도 훌쩍 넘긴 장신의 운동신경 좋은 천재들이 경기 중에 링을 박살 낼 기세로 덩크도 꽂아 넣고, 자유자재로 리바운드를 하는 경기가 연이어 펼쳐지는데 사실 그들이 동양권의 '고등학생'이라는 건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사실처럼 느껴지게 만든 건 데생과 표현력의 힘이에요. 천재작가의 사실적인 묘사가 이들을 살아 숨 쉬는 주변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애니메이션의 개봉에 별 흥미가 없었습니다. 송태섭 서사에 큰 관심이 없기도 했고, 아무리 어린 시절 슬램덩크를 좋아했었던들 이건 너무 오래 사장 돼 있던 기억이었거든요. '너무 좋았다'라는 기억과 함께 그저 묻어두고 싶었던 기억입니다. 너무 해묵은 명작으로 다시 들춰보기 부담스러운 작품이었어요. 실망하고 싶지도 않았고(아다치 미츠루의 <터치>가 이제 와서 다시 보니, 이제는 조금 보기 부담스러운 작품이 되었더라고요. 이제는 비슷한 설정을 너무 많이 봐서 오히려 원조가 클리셰처럼 여겨지는 부분도 있고, 시대가 너무 변하고 내가 더럽혀져서 손 한 번 잡고 고백의 말 한마디 건네는 일에 큰 의미 부여하는 애들이 아무리 급식이어도 약간 항마력 딸리기는 하거든요), 너무 좋아서 지금 내 현생이 흔들릴 수도 있을 것 같은 과거의 추억이니까요. 이렇게 거창하게 썼지만 큰 용기 필요 없이 그냥 입고 계신 츄리닝 차림 그대로 가까운 영화관으로 가시면 됩니다. 추억과 마주할 시간입니다. 주말 아침 갑자기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 유년시절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왜 때문에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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