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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Nov 11. 2022

우리가 함께 있는 곳이 진짜 나의 세상이야

에에올,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인류애가 필요했던 날 이 영화를 봤다. 인류애보다는 가족애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 하는 그 모든 선택의 기로에서 내가 가지 않은 길의 수만큼 평행우주가 있고 그 우주에서 무수한 내가 살고 있다는 건 얼마나 안심되는 일인가. 선택의 기로에 자주 섰던 에블린은 누구보다 많은 평행우주를 가졌고, 그 많은 평행우주의 다른 에블린들에게서 에너지를 빌려와 우주를 구할 멀티버스의 마스터가 된다. 


‘지금, 여기’ 있는 나는 하나의 ‘경우의 수’

카를로 로벨리는 우리가 느끼는 현재의 시간이 인지의 한계에 갇혀 규정한 개념에 불과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지내왔다 믿는 과거는 기억의 모음이며, 우리가 지낼 것이라 믿는 미래는 상상의 모음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인생은 내 선택에 따라 순차적으로 흘러오지 않았다. 내 인지 밖에는 무수한 다른 경우의 수가 각기의 시점에 존재하고 있다. 타임슬립은 시간을 거슬러 가는 여행이 아니라, 다른 차원, 내가 현재 인지하고 있는 이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가는 여행이다. 다른 사건 공간에서는 다른 경우의 내가 살고 있다. 어느 날 그 다른 공간의 나를 내가 인지할 수 있다면 어떨까?

지금 내 고통이 내가 겪는 무수한 운명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질까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을 멈출 수 있겠다.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이 경우의 수 우주에서 나는 오늘도 고군분투하지만 동시에, 행복한 나로 가득한 평행우주들이 있다면 그것은 위로가 될 수도 있겠다.  가지 못한 길이라는 건 없는 거니까. 하지만 가지 못한 길의 내가 느끼는 것을 나는 느낄 수도 없고 일반적으로는 알지도 못하는데, 무슨 소용일까?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첫 번째 막의 마지막 메시지처럼, 나는 그냥 내 인생에서도 주인공이 아닌 하나의 경우의 수이니 허무하다. 




'우리가 함께 있는 곳'이 진짜 나의 세상이야

마스터가 되어버린 에블린은 그 모든 선택의 기로에서 가장 나았던, 가장 좋은 삶을 선택하여 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택하는 것은 때로 ‘혐생’이라고 불러도 좋을, 평범한 현생이다.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살아온 곳을 떠난 것, 그렇게 외면했던 아버지가 아픈 것, 한때 모든 것을 바친 남자가 이혼 서류를 내미는 것, 실패한 선택이었다, 후회 끝에 에블린은 조이를 얻은 기쁨을 인지한다. 포기할 수 없이 소중한 것. 이 기쁨을 이미 알고 있는 에블린은 그 어느 우주에서도 조이 없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으니까.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또 딸과 격렬히 싸울 테지만, 현재의 삶을 단호한 확신에 차서 선택한 에블린의 얼굴 앞으로 내가 아는 엄마들의 얼굴들이 스쳤다. 모성과 희생의 감정이 아니라 그냥 단단한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없는 세상은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 우리가 함께 있는 곳이 진짜 나의 세상이야." 라고 말하는 듯한. 




우리의 현생에서 생계와 연관되지 않은 엉뚱한 짓은 무시당한다. 멀티버스의 세계에서 평소에 하지 않던 무의미한 행동은 다른 우주로 연결되는 열쇠가 된다. 에블린은 갑자기 적에게 사랑한다고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고, 바지에 오줌을 싼다. 인생의 어떤 기회와 구원은 내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던 짓을 하고 가지 않을 길을 가는 데서 오기도 한다. 그것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다른 멋진 선택의 결과를 사는 공간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는 갓생을 살고 있다고 해도, 우리 인지가 이해하는 상식 밖의 일을 해보는 것이 의미 없지는 않을 것이다. 




지구라는 공간이 우주 속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인지가 만들어낸 공간이며 시간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만든 서사라고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우주의 원리를 깨우칠 수 없다고 한다. 안 하던 어떤 일을 하면서 뇌의 구석구석을 써보면, 우리의 이치로 알 수 없는 어떤 원리로 즐거운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는 불금. 모두 회사의 우주에서 제시간에 벗어나 즐거운 퇴근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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