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케 쇼의 <새벽의 모든>, 상냥한 무관심
이 영화의 정서를 요약하면, "아 좀 캐묻지 말고 저리 가라니까요. 아니 근데 이제 그렇게까지 멀리 가진 말고. 거기쯤 서 있어요. 뒤돌아보면 보이긴 하는 곳 정도에." 정도인 것 같다.
미야케 쇼의 영화를 처음 봤는데, 주변에서 추천도 많이 받아왔지만 여태 단 한 편도 보지 않았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다.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은 쪽이냐,고 하면(일본 영화를 봤더니 일본식 말투를 자꾸 쓰게 된다), 글쎄 재미는 있었지만 메시지 전달 방식이 내 취향에 맞거나 마음에 쏙 들었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한 장면이 너무 내 전용 웃음 버튼처럼 몇 장면이 웃겼다. 이발 씬은 사실은 그렇게 웃긴 장면은 아니었던 것도 같은데, 영화 속에서는 웃긴 장면이라기보다 그냥 좀 중요한 아이스브레이킹이 되는 변곡점이었을 것 같은데, 나에게는 너무 웃겼다.
5센티 자르라는데 꼭 12센티 잘라내는 미용실이 얼마나 젠틀한 건지 알게 됐다. 미용실은 몇 센티미터 자를 건지 최소한 고객한테 물어보고 자르니까. 며칠은 웃음 버튼일 것 같은 미용이다. 미쳤냐고, 상식적으로 초딩도 남의 머리카락 앞에 그렇게 패기 넘칠 순 없는 거 아니냐고. 개털 미용할 때도 그렇게 용맹하지는 못할 것 같다고. 나도 한때 가끔 누군가의 머리를 잘라줬었는데, 내가 얼마나 훌륭한 미용사였는지도 알게 됐다.
" '네, 네'는 또 뭐야?" "아 미안해요 네는 원래 한 번만 하는 거지 미안합니다."
몇 번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끝간 데까지(저 정도를 끝간 데까지 라고 볼 수 없기는 한데, 이들은 연인이 아니고 타인이니까.) 오구오구 그래쪄 하고 받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냥 세상에 무섭고 못 참을 게 없어지더라. (받아준다고 끝없이 지랄하는 사람 서로 아니라는 전제 하에)
무지한 타인의 어떤 상황에, 아니 내가 잘 아는 상태라고 해도 함부로 판단해서 말 얹지 않는 거,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 중 하나. 세상은 남의 신체적 물리적 상태에 걱정을 가장하여 너무 우악스러울 때가 있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멋대로 판단해서 얘기하지 마세요! 라는 후지사와의 신경질적 외침이 때론 이해가 간다. 특히 크고 작게 실제로 몸이 아파보면 더 체감할 수 있다. 누군가 사람들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아픔을 지나는 중이더라도, 띄엄띄엄 주워들은 상식에 기대어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아파보면 알 수 있다. 안 아픈 사람은 모르는 거대한 세상과 우주가 거기에 있다. 안 아플 땐 아무도 일일이 그렇게까지는 세세하게 말해주지 않는 무한소의 연속 같은 거. 그리고 우악스럽게 타인의 상태를 자기 잣대에서 평가하고 다른 이상한 것들이랑 동 카테고리화해서 말해버리거나, 함부로 조언하는 게 얼마나 무례한 행동인 지도 알게 된다.
누군가의 말대로 어른이 되는 건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 깨우치는 매우 긴 과정인 거라서, 성숙할수록 이 말이 무례할까 이 말이 맞을까, 단언하고 판단하는 말을 아끼게 되기는 한다.
사람은 죽어서 별이 되지 않아요. 사라져요. 다만 지구가 기울어진 자전축으로 빠르게 자전과 공전을 하는 한, 기쁨으로 가득한 날도 슬픔으로 가득한 날도 언젠가 반드시 끝납니다,라는 말. 그 뒤에 이어지는 조금 뻔하지만 그래도 분명한 위로들, 어둠이 있어서 우리는 우주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어둠 너머에는 무한한 다른 세계가 있고, 가장 어두운 시간을 거쳐 매일 아침은 찾아온다는 말들. 아 글쎄 있어봐요. 새벽은 반드시 온다니까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새벽에 창문을 열어놓으면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안심이 된다는 소리를 하던 누군가 있었는데, 그렇듯 매일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이 찾아온다는 건 인류의 DNA에 안심으로 새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새파란 하늘과 머리카락과 얼굴 솜털에 부서지는 눈부신 햇살, 삐걱거리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얼굴에 맞는 기분 좋은 바람이 사람의 기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부는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힘들 땐 우주 생각하라고 해주는 마음, 꼭 같은 걸 겪어보지 않아도 이런저런 자기 이야기 들려주며 옆에 앉아주는 마음이 든든하다. 누군가의 기행에 놀라지 않고, 무지한 상태이니 함부로 말 얹지 않고, 괜찮다며 다독여주고 몇 번은 눈 감고 못본 척 해주는 마음이 안심된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남녀이지만, 서로 상황이 다르지만, '세 번에 한 번'쯤은 그렇게.
있어준답시고 같이 진료실 들어가서 ‘언제’ 낫는 거냐는 말을 하는 사람과는 같이 있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일 앞에, 옆에서 쓸데없이 기대하고 틀어지면 조바심 내는 연인은 너무 포악해서 슬픈데?
영화관 가기 바로 앞전에 명절에도 여는 병원에서 얼굴에 포진이 잔뜩 올라온 갓난 아기와 높은 열에도 얌전하게 앉아있던 촏잉을 포함, 10여 명의 대기 환자를 한숨 푹 쉬며 둘러보고 간호사에게 ”얼마나 걸려요?“라고 짜증 내며 묻는 모르는 사람을 보고 온 뒤라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음. 간호사가 그걸 어떻게 알까 싶어서, 응급실에 가까운 병원인데 식당에서 테이블 빠지는 속도보다 더 예측하기 힘든 일이다. 다음 일정보다 여유 있게 오는 수밖에 더 있나… 물으면 뭐가 달라지고 안심이 되나. 어차피 불확실한 대답만 돌아올 텐데. 나는 효율 없이 성급하고 불안이 많은 사람을 가까이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늘 주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또 걸어야 덜 불안한 사람. 나는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발견해서 타는 요행을 노리거나 가만있으면 순리대로 돌아간다는 주의여서, 여러 번 상황을 의심하고 부정적 상황을 염불 외듯 얘기하며 주변 사람들을 독촉하는 불안한 사람을 주변에 잘 두지 않는다. 일상생활에는 잘 없고 가끔 회사 생활하다 만나긴 하는데, 항상 이직이나 사내 이동 시 유일하게 속으로 바라는 점이 그 부분인 것 같다. 불안이에게 조종간을 늘 일부 내어주고 있는 사람을 매일 옆에 끼고 일하는 때가 제 인생에 거의 없게 해주세요.
그래서 이 영화는 그런 속세의 불안과 독촉과는 상반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움직이는 서로를 한 걸음 떨어져 지켜봐 주는 느긋한 연대에 대한 이야기다. 언제부터 그래, 왜 그런 건데, 이건 해봤어? 따위로 독촉하며 '너 비정상이야' 하지 않고, '정상적' 상태로 상대방을 우악스럽게 끌어오려 애쓰지 않고 그냥 그대로 지켜주는 공동체.
일본의 연인들은 되게 쿨하구나 생각함. 멀리 갈 때도 다 결정되고 갑자기 말하는구나… 힘들 때 물 같은 거 필요한 거 가져다준다고 황급히 자리를 뜨는 사람보단 옆에서 뒤에서 계속 따라오며 지켜봐 주는 사람을 보며 나도 누군가에게 저런 사람이 돼야지 생각도 해봤다.
응달과 양달이 반복되는 자전거길이 무서웠다. 끼익 쾅! 클리셰에 절여진 관객을 의식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몇 번이고 마음이 오르내리면서 애들의 내면과 일상에 스릴감을 느끼며 집중했는데 1/3 정도 차있던 영화관에서 거짓말처럼 누군가 스스로의 코 고는 소리에 깨기도 했다.
자녀 둘 중 하나는 아프리카계 혼혈인데 그에 대해 한 마디도 안 하는 것까지 요즘영화스러웁고 좋았다. 너 얼굴에 뭐 났어, 피곤해 보인다, 어제 뭐 먹고 잤냐, 머리 왜 잘랐냐 헤어졌냐, 너 이제 그런 데 갈 나이 아니다, 너 결혼 언제 해, 얌마 너 공부 잘해? 둘째 안 낳니? 너네는 의도적 딩크족이니? 등등등의 '궁금증을 참는 상냥함' '상냥한 무관심'이 일상인 나라가 가끔 부럽기도 하고, 아니 그런데 그런 우악스러운 관심이 가끔은 그립거나 반갑고 좋기도 하고. 나는 어중간하게 늙은 사람이라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