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그러나 우리는 곧 죽을 것이고,
그 다섯 명에 대한 모든 기억도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받다가 잊힐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
모든 사랑의 충동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랑으로 돌아간다.
사랑을 위해서는 기억조차 필요하지 않다.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땅이 있고,
그 둘을 잇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
-본문 중에서
1714년 7월 20일 금요일 정오,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가 무너지며 다섯 명의 여행자가 그 아래의 골짜기로 추락했다. 이를 목격한 사람은 주니퍼 수사였는데,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가 십 분만 저 다리를 늦게 지나갔더라면..."이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겠지만, 그는 왜 하필이면 이 다섯 명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그들의 삶을 조사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어떤 이들은 우리는 절대 모를 거라고, 신에게 우리는 여름날 사내아이들이 죽이는 파리 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말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하느님이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지 않는 한, 참새의 깃털 하나도 그냥 빠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본문 중에서
불행의 이유 묻는 우화. 어떤 사람은 일생 요행 불행을 피하며 행복하게 살고 팔자나 축복, '신의 몰빵'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겠지만, 과연 누군가는 신에게 사랑받고 누군가는 선택받지 못했던 걸까. 뒤틀린 사랑을 할 운명이나 불행은 타깃(숙주)과 의도를 가지는가.
어렸을 때는 상대적으로 자신이 외모나 지능에 신의 몰빵을 받았다고 자만할 수도 있고, 온전한 가족의 존재와 그들의 건강이 당연할 수도 있지만 인생은 어떤 관점에서는 매우 기니까, 미래까지 행복할 거라고 완벽하게 자신할 수는 없을 거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선이 매우 다르기도 하다. 어쨌든 어느 날 무너지는 다리 위에 서 있을 운명을 신이 나에게 주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다. 차라리 내가 서있었다면 다행이지, 신이든 운명이든 무언가가 나에게 나보다 더 사랑할 사람을 주고, 시간과 추억과 기억을 쌓게 만들고, 그러다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만들면, 우리는 어떻게 불행을 버텨내야 하는 걸까. 우리는 큰 좌절 앞에서 항상 물을 것이다. 1. 왜? 2. 이것은 내 잘못일까? 3. 내가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을까?
이것이 세상에 널려 있는 흔한 사랑 예찬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 소설은 아무것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똑똑한 사람들이 '없어서 허망한 신'과 '있는데 엉망인 신' 사이에서 헤맬 때, 어떤 지혜로운 사람들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라는 구절이 삶의 무의미가 아니라 유한함에 대한 것임을 새길 줄 알고(송민원, <지혜란 무엇인가>, 감은사), 그래서 '우연인가 의도인가?'라는 질문을 이번엔 인간을 향해 물을 줄 안다. '당신이 그렇게밖에 못 살고 있는 건 우연인가, 아니면 당신은 아마도 부정할 당신의 의도인가.'
-신형철의 해제, '샘 속의 숨겨진 샘' 중에서
소설이 말하려 했던 답은 1. '모름, 아무도 모름' 2. '그렇지 않다' 3. '그렇지 않다' 일 것이다. 인생의 행불행은 아마도 우연과 랜덤이고 나를 위해 섬세하게 설계된 불행의 미로나 늪은 '의도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에서 지속적으로 극적 불행을 맞는다면 그건 그냥 그렇게 된 일이다. 누군가가 벌을 주거나 저주하려고 했던 것도, 자기도 모르게 지은 죄에 대한 죗값을 받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내가 뒤틀린 사랑을 하거나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빠질 것 같으면, 나는 그 또한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 시절 그렇게 자란 내가 피오 아저씨가 징그럽고 미운 순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당연하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기 전 걷지 못하는 거랑 똑같이, 그때의 나는 감정이 그랬고 감정이 너무 그래서 거짓으로라도 다정할 수 없었던 거다. 이 또한 소설이 논하듯 내가 사내아이들에게 돌 맞는 파리든지 털 빠지는 참새든지 누군가의 의도가 있든 없든 내 잘못은 아니라는 거고 나는 속죄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문장에서 중요한 건 주어나 목적어가 아니라 '사랑한다'는 동사다. 주어와 목적어는 몹시 중요하다고 반박하고 싶어질 때 그다음 문장이 우리를 품는다. "모든 사랑의 충동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랑으로 돌아간다." 신의 사랑이라는 대양에서 인간의 사랑은 서로 섞인다.
-신형철의 해제, '샘 속의 숨겨진 샘' 중에서
그럼에도 어떤 우주의 흐름이나 업보라 착각할 만큼 불행에 빠지는 날이 혹시 온다면, 삶에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무수하고 지난한 방황 중에 그나마 위로 삼아 되새겨볼 성싶은 삶의 우화 같은 소설. 우리의 인생을 점유했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그 기억은 얼마나 소중한 삶의 의미인지. 그리고 그 사랑의 기억을 가진 사람 모두가 사라진다 해도 인간의 사랑은 기억이나 존재 같은 물리적 개념을 초월하여 남는 아름다움이다.
남녀의 사랑이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승화되어 있는 상태는, 자기애의 확장 같은 가족 사랑이나 공동체 사랑에서 그치지 않고, 순수하게 육체의 사랑에서 시작하여 다른 사람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인류에 대한 사랑을 갖게 되는 상태인데, 어떤 불행이 빛나던 사랑의 날들을 비극적 사건으로 급작스레 종결케 하더라도 그 궁극의 상태에 가닿았던 것만으로 인생은 아름답다는 것. 그것이 살아남아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는 인간에게 그나마 가장 의미 있는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살아남아 있는 동안, 최대한 있는 그대로, 정확한 의도 그대로, 오래오래 많이 기억해 줄 것.
결국 나만 남겨지고 사랑하는 이가 먼저 떠나더라도, 마침내 모두가 사라지더라도, 빛나던 사랑은 의미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사랑은 삶의 의미 그 자체라는 것. 물랑루즈에 나오는 대사처럼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태어나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사랑받는 데 있으니까.
나는 서른을 갓 넘긴 청년이, 자신이 쓰려 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지만 그걸 쓸 능력이 있는지 알지 못해 번민하다가, (중략) 마침내 문장으로 적는데 성공하는 어떤 밤들을 상상한다. 내가 믿지도 않는 그 신이 이 책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에 개입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건 우연이 아니라 의도였을 거라고 말이다.
-신형철의 해제, '샘 속의 숨겨진 샘' 중에서
너무 뻔한 옳은 말을 동화처럼 빗대어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하여 접근하지 못하던 소설인데 출장길에 혼자 우연히 작은 서점에 들를 일이 생겨 뒤적거리다가 데려왔다. 뒤통수를 맞은 듯 들어오는 강렬한 어떤 문장이 있어서 구매를 결심했는데 오히려 다 읽고 나니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왔던 건지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하겠다. 비 내리는 날 갑자기 투명 비닐우산을 샀고, 자주 가던 재즈바가 오픈하기 십분 전에 바로 옆 서점에서 고른 책이었고, 결국 습기 가득한 통창을 통해 구도심의 인적 드문 억텐거리를 바라보는 닷지석에서 혼자 쿠바 리브레를 빠르게 들이켜면서 읽었기 때문에 비와 재즈와 알코올에 취해서 좋았을지도 모름 나는 비만 보면 환장하는 ㅁㅊㄴ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