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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Jan 09. 2017

청춘 스케치(Reality bites)

현실이라는 괴물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나를 아프게 깨문다

"Reality bites, 현실은 깨문다.

현실이라는 괴물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나를 아프게 깨문다"                                                                                                                                                                                                                                                                                                                  





청춘스케치(Reality bites/1994)


연출: 벤스틸러

출연: 벤스틸러, 위노나 라이더, 에단 호크





포스터에 나열된 배우들의 이름 순이 지금이라면 딱 역순일 것 같은 느낌.



2004년 우리동네 비디오 가게가 폐점하는데 이 비디오를 팔고 있기에 한참 망설이다 그냥 돌아왔었다.

대신, 당시 거의 10년 만에 떠올린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또 보면 또 거의 10년 만인가. OST가 매우 좋다.



"이 주어진 문제들을 어떻게 풀면 좋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답은...잘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레이나와 트로이, 친구들이 졸업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여주인공 레이나는 졸업생 대표 연설의 마지막을 위와 같이 장식한다.

그리고 졸업식이 끝난 후 졸업 가운을 그대로 걸치고 친구들과 학교 건물 옥상에서 맥주를 함께 마신다.



"난 스물 세 살이 되면 뭔가가 되어 있을 줄 알았어."

"네가 스물 세 살까지 되어야 할 것은 너 자신이야."



졸업, 끝과 시작

빨리 어른이 되고 싶던 시절에는 저 문을 열면 어른들의 세계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어른이 되는 날은 오지 않았고 이제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단언컨대 인생에서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알고보니 그런 것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미생에서 동식이도 말했지만 인생의 중요한 관문같은 단계를 지나면 결론이 나고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문을 열 때가 되면 마지못해 성의없이 내 앞의 문을 열면서, 삶이 나에게 던지는 질문들에 대충대충 대답하며 지나왔고 장난으로 '이번 생은 망했어'를 입에 달고 산다.

어른이 된들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알고, 주어진 문제의 해결법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건 우리 할머니도 몰랐을 지도 모른다.



Reality bites, 현실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나를 아프게 깨문다

졸업하고 마주친 현실이 가장 차갑게 느껴졌던 이유는-나쁜 상사나 체계없는 프로세스로 괴로워 한 적도 있다만-'나답게 살 수 없다는 거'였다. 그건 정말 현실이라는 괴물의 차디찬 이에 세게 물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끼던 친구는 '네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 인생 대신 살지 말고' 라고 했다.

퇴근하는 버스에서 매일 울기도 했다가, 밤이 새도록 내가 하고 싶은 건 그럼 뭘까 하고도 생각해봤지만 결론은 없었다. 아직 청춘이라 그런가. 일단 노예로 살고 있는 것 같다. 조직에 소속돼 글 쓰는 노예로 열심히 일하고 있고 보람과 재미도 느끼지만, 꽤 그럴 듯한 아이디어를 내고 좋은 글을 쓰더라도 조직에서 쓴 글은 내 것이 아니다. 자기가 노예인 걸 아는 어른이기라도 하면 꽤 훌륭한 어른이다. 그러니 다 같은 노예끼린 갑질하지 말아야지.



배우들

지금 봐도 마치 배우들의 어벤저스 같은 느낌의 소수정예부대이다.

벤 스틸러는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높지 않아 '박물관이 살아있다' '쥬렌더' 등에 나오는 단순한 코미디 배우인 줄 아는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지금은 그 영향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국내에선 그 인지도가 '월터미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전후로 나뉘는 것 같기도 하고.

에단 호크의 필모 중 소중하지 않은 것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가타카, 비포 선라이즈, 위대한 유산 등, 가장 사랑하는 영화들의 대부분에 에단 호크는 함께 있다.

위노나 라이더는 정말 좋아하는 배우였고 조니뎁과 함께 있을 때 아름다웠으며, 청춘 스케치에서 가장 빛났다. 대충 흐트러져도 예쁜 커트머리에 청바지, 청순한 얼굴을 하고. 되바라진 대사를 뱉거나 남의 차에 담배 꽁초를 투척하고 욕설을 하는 퇴폐적인 행동을 해도 청순하게 예쁘기만 했다......



청춘의 요건, 사랑: 삼각관계
삼각관계 몇 번 안 겪어본 청춘은 없지 않은가?

응? 왜 그래요, 삼각관계 한 번도 안 겪어 본 사람처럼. 나를 두고 두 이성이 싸우는 일 다들 한 번씩 겪는 거잖아요.^-^


......일단 여주인공 레이나는 말이 잘 통하는 보헤미안 친구 에단호크(미역요괴 머리를 하고 나옴)와,

성공한 여피족(레코드사 사장인가), 지성미와 돈내음의 훈풍을 몰고 다니는 벤 스틸러(지금으로선 벤 스틸러가 이런 역할을 맡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사이에서 방황한다.

두 남자는 레이나를 놓고 싸운다.   


-당신은 그녀가 뭘 원하는지 몰라.

-어쩜 난 당신은 결코 모를 그녀가 원하는 것들을 알지.


레이나는 요런 류의 바람직한 발언으로 벤 스틸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도 물질주의자가 아녜요. 전 아마 돈 못 받아도 일할 거 같아요. 그리고 큰 집보다는 예쁜 집을 갖고 싶어요.  



방황하는 레이나를 보며 지금껏 확실하게 다가가지 않고 주위를 맴돌았던 트로이.

레이나와 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한 뒤 레이나와 멀어졌던 트로이는 돌아와 이렇게 말한다.

"내 어깨를 후회의 행성이 짓눌러(고백하지 못한 후회)."

이 대사가 필립 K딕_화성의 타임슬립에 나온

"염병할, 이따금 화성 전체가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그런 내가 아기처럼 보인다고?"

와 연관있다는 걸 나중에 책을 읽으며 알았다.



거의 모든 대사가 명대사.

청춘 스케치의 대사들은 지금 보면 너무 신경쓴 티가 살짝 나서 약간 오글댈 수도 있는 경계선에 미묘하게 위치한다. 청춘, 이라는 주제가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과 모든 것이 진지하던 90년대 영화라는 것을 감안하고 보면, 청춘을 대변하는 수 많은 날 것의 대사들은 주옥같기만 하다.



-난 사소한것들이 좋아.

비오기 10분 전의 하늘이라든가 웃음소리가 함박웃음으로 변하는순간, 이런것들 말이야

 


-모든게 무의미한 거야, 단지...허무한 비극과 모면할 수 있는 상황들의 복권추첨 같은 거지




-그리고 영화를 가장 빛내는 대사

'청춘'의 정의같은 대사
“봐, 레이나. 이게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야.

담배 몇 개비, 커피 한 잔, 약간의 대화, 너와 나, 그리고 단돈 5달러.”





구 씨네 21 기자이던 백은하 기자님을 정말 좋아하는데

역시나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멋진 글을 쓰셨다. 첨부해본다. :)))


벤 스틸러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청춘 스케치>는 원제인 ‘Reality bites’처럼 이제 막 ‘현실’이라는 과자를 깨물기 직전의 사람이라면 반드시 꺼내봐야 할 청춘 영화의 명작이다. “삐 소리가 나면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존재하는 이유를 말하세요” 트로이(에단 호크)의 자동음성메시지의 안내처럼 그들은 여전히 이름과 전화번호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이룬 것도, 이룰 가능성도, 존재의 이유조차 모르는 모호한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어두운 클럽의 마이크 뒤로 자신의 청춘을 유예시키고, 누군가는 유료 전화 도우미에 의존해 비싼 전화비를 버리고 청춘의 시간들을 낭비한다. 하지만 그 따위 청춘들이, 그래도 견딜만 한 것은 그 상실과 혼란의 시대를 결코 혼자서만 통과하고 있지 않다는 위로 때문이다. 레이나와 트로이가 ‘커피와 담배’를 나누며 산책하던,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그 순간처럼 말이다.

“이봐, 레이나. 이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거야. 담배 몇 개비, 커피 한 잔, 약간의 대화, 너와 나, 그리고 단돈 5달러.”


-씨네21백은하 기자의 글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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