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좌 스필버그의 인류애
이념 이전에 인간이 존재해왔는데, 인간이 만들어낸 이 이념은 가끔 사악하게 악용된다. 이념에 지나치게 빠져서 다른 이념을 배척하든, 다른 목적으로 이념을 이용하든, 가끔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이념에 매몰돼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다. 오죽하면 마르크스는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라는 말을 남겼을까.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스필버그가 본좌라는 것을
등장하는 인물의 대사톤, 음악을 비롯한 모든 요소는 조용하고, 영화는 1그램도 감성에 젖거나 흥분하지 않고 세련됨을 유지한다. 격앙되어 거창한 연설을 늘어놓지도, 멋진 척 하지도 않은 채 담담하게 인간의 존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어떤 영화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과 깊은 전율을 전한다. 생각해보니 성인이 되고 난 이후, 제대로 작정하고 본 스필버그의 영화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독일인이 왜 다 이렇게 바보 멍충이로 나오지 하다가 생각해보니
아 참 스필버그 감독 유대인이었지
[스포 매우 다량 탑재]
'스파이 브릿지'는 미소 냉전 시대 포로 맞교환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고 하는 영화다.
종전 후 우리나라 반공교육 못지 않은 교육이 행해지던 미국. 소련이 미국 자국민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두려움이 미국 내에 팽배하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어린 초등학생들이 두려움에 떨며 눈물 쏙 빼고(아동 학대 수준으로 느껴지도록 연출함), 집에 가서 욕조에 전쟁에 대비한 물을 받아두게 만들 정도로 공포와 위협을 바탕으로 한 반소 교육과 흑백논리(적이냐 아군이냐)만이 한창이던 때, 1950년대.
보험전문 변호사이던 도노반(톰행크스)은 변호사협회의 권유에 따라 검거된 재미 소련 스파이 아벨의 변론을 맡게된다. 명목은 '미합중국은 스파이에게도 공정한 재판의 기회를 보장할 정도로 인권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걱정 안 돼요?", "죽을 지도 모르는데 두렵지 않아요?"
도노반의물음에 아벨은 일관된 무표정으로 이 한마디를 반복한다.
"걱정한다고 뭐가 달라져요(Would it help)?"
아벨은 그저 스파이로서 직무에 원칙대로 충실했을 뿐이다.
역시 직업윤리와 기본적 인권존중에 기반하여, 단지 원리원칙대로 일을 노멀하게 처리하려 했을 뿐인 도노반은 해당 건을 맡은 판사, cia, 미국 시민, 그리고 자신의 어린 아들로부터 '왜 우리의 적인 소련의 스파이를 보호하느냐' 는 격한 비난을 받게 된다. 도노반은 동요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가족의 안전마저 위협 받았지만, 전문가로서 그가 처리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저 사람의 인권도 존중받아야해! 나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이토록 노력하고 있어!' 라고 단 한번도 말하지 않는 것에 이 영화의 최고 미덕이 있다. 도노반은 그냥 직업 윤리를 지키며 배운대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독일에서 죄없이 포로로 잡힌 자국민 유학생보다 국가 안보 상의 비밀을 누설할 우려가 있는 포로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cia, 받은 변론에 착수하자마자 '네가 할 일을 평소 하던 원리대로 하면 국가 안보에 반하는 일'이라며 도노반을 미행하는 cia요원(이상하게 기시감이 돋는다. 지구 어디를 가나 인류가 있는 곳에는 발생할 법 한 일이라서 그런 것일까 과연). 도노반은 '의뢰인의 비밀을 지킬 변호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 며 cia요원에게 Sob라고 시원하게 욕을 해준다.
모든 상황에서 도노반은 정의롭지 못하거나 부도덕한 것에 부들부들하는 대신 적절하게 상대에게 이익을 떠먹여주는 방법을 제시하고 영리한 협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이런 업무 중심적 해결 과정 자체가 말로만 격정적으로 인권 운운하는 것보다 더 결과적으로는 인류애에 더 가깝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 좀 더 확장하면 자기 국민에 국한된, '이기주의의 확장'같은 사랑(영화에서 도노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 아닌, 인류 전체의 존엄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느껴진다.
25세의 유학생 포로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가족도 아닌, 사무실에서 일하는 '더기'와 나이가 비슷하다며 더욱 구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모습에서도 도노반의 성향이 암시된다. 동요없이 차근히 옳다고 믿는 일을 해나가는 그를, 아벨은 "Standing man" 이라고 부른다("오뚝이같은 놈" 으로 의역 돼 개봉했다).
작별의 순간도 담백하다. "난 선물을 준비 못했는데"라는 도노반의 말에 아벨은 "이것(본국으로 돌아가게 도와준 것)이 선물이다" 라는 담백한 진심의 말로 고마움과 존중을 전한다.
영화 도중 등장하는 미합중국 대법원에 적힌 문구는 도노반과 아벨이 겪고 있는 부당한 상황들에 아이러니함을 더한다.
25세의 어린 민간인 유학생까지, 모든 포로가 안전하게 풀려나기 전에는 절대 포로교환을 하지 않겠다며 초연한 의지("잠깐만 여기 서서 버티면 되는데 왜 못견뎌하는거요")로 일관하는 도노반, 두 사람 모두를 구하겠다는 도노반의 신념을 존중해 신뢰하고 기다려준 아벨.
아벨이 차 뒷좌석에 타는지 환대받는 지 끝까지 지켜보는 도노반, 도노반에게 남긴 아벨의 덤덤한 선물. 두 사람은 이념이 다르지만 서로의 윤리와 신념을 믿고 교감한다.
인간이 만든 '이념' 에 인간이 매몰되고 잠식 돼 인간의 존엄에 반하는 일들을 벌이던 시대.
어른들의 이익이 얽힌 전쟁으로 이유없이 희생 당하는 어린 아이들과 푸른 청년들. 전쟁이 얼마나 잔인한지, 누군가의 잘못된 신념과 이익 때문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다치는지, 이념이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보다 앞서는지.
도노반은 기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베를린 장벽을 타넘던 청년 서너명이 그 자리에서 즉시 총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이 영화에서 별별 일을 다 겪으면서도 덤덤함을 유지하던 도노반이 가장 심하게 동요하는 장면이다. 가족이 위협을 받을 때도 덤덤했던 도노반은 인간에 대한 존중과 인권이 사라졌을 때 동요한다. 모든 사건이 해결되고 사람들의 달라진 시선 속에서 역시 전과 다를 바 없이 덤덤한 모습으로 출근길 지하철에 타고 있던 도노반은, 천진하게 담을 넘고 뛰노는 미국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기시감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도노반은 실제로 이 포로교환 협상 이후 케네디 대통령의 부탁으로 피델 카스트로와의 협상을 통해 그의 마음을 사고 수십 수백명의 목숨을 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인물을 영웅으로 그리고 영웅의 심적 고뇌를 그리는 대신 담백한 서사로 따라간 것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더 효과적으로 전한다.
신체 건장하고 능력좋은 프레시맨일 뿐이었는데 국가의 부름으로 엉겁결에 스파이가 되고, 유사시 목숨을 버릴 것을 요구당하다 소련으로 스파이 정찰갔는데 적에게 잡힌 상황에서 자살하지 않은 죄로 자국에서 짐짝 취급 당하다가 도노반으로 인해 1+1 교환당하고서야 고국땅을 밟은 어린 청년. 위플래시에서도 잘생겼었지. 실제로 이 인물은 당시에는 자국에서 환대받지 못하다가 사후 한참이 지난 2000년대 이후에나 훈장을 받으며 국가에 대한 공로를 인정 받았다고 한다. 이 재판의 재현 장면에 나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미지의 소련어와 낯선 외국인(alien)이 영어로 통역해주는 센텐스는 긴장감을 더한다.
이념은 인간이 만든 것이며, 이념들 중 최고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이념은 이론을 만든 자가 세운 하나의 가설이라고 봐야 하며, 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하나의 완성된 이론이 되기 위해 모두 그럴 듯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모든 근거가 완벽하게 갖춰진 가설을 듣고 자란 사람은 그 이념이 세상의 진리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념 이전에 인간이 존재해왔는데, 인간이 만들어낸 이 이념은 가끔 사악하게 악용된다. 이념에 지나치게 빠져서 다른 이념을 배척하든, 다른 목적으로 이념을 이용하든, 가끔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이념에 매몰돼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다. 오죽하면 마르크스는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라는 말을 남겼을까.
도노반과 아벨은 각자의 확고한 이념이 있었지만 직업윤리와 행동 원칙에 따라 이성적으로 행동하며 서로의 신념과 서로의 영역을 존중한다. 결국 이념의 궁극적 목적은, 효율, 평등, 수 많은 미덕 중에 무엇을 우선시하든, 모든 인류가 행복하고 충족하게 삶을 영위하며 화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악용되지 않은 모든 이념의 목적은 결국 선하다. 사익에 연연하지 않고 이념의 본질대로 이념을 추구하는 도노반과 아벨은 서로 경계하거나 미워할 필요가 없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