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The day after)

왜 사냐건 '모른다'

by 랄라


왜 그랬어, 라는 질문만큼 무의미한 건 없을 것이다.
왜 사세요? 라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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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권해효, 김민희, 김새벽, 조윤희


국인지 물에 만 밥과 간단한 밑반찬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출판사 사장 봉완 앞에 아내가 와서 앉는다. 이것저것 건성의 대화를 하다가 아내가 묻는다.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봉완이 대답하지 않자 아내의 표정이 점점 굳는다. 밥을 다 먹은 봉완은 집을 일찍 나선다. 인적 드문 어스레한 새벽 출근길 지하 주차장 입구를 지나고, 길을 건너고, 운동기구가 있는 공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봉완에게 익숙한 모든 곳에는 봉완의 과거가 유령처럼 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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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그만 둔 애인 대신 새로 출근한 아름(김민희)을 만난다. 새 직원 호구조사 중 아픈 가족 이야기에 눈물을 쏟은 아름은 세수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가고 두 사람은 마포구 잔다리로 60번지로 자장면을 먹으러 간다. 사무실과 점심 먹으며 걷는 거리, 대표 말고 사장이라고 부르라는 강요까지 모든 것에 또 유령같은 과거가 서려있다. 영화는 일상에 가득한 과거와의 매개에 따라 과거를 소환한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서 연결된다. 새벽 어둠처럼 어스름하던 과거는 급기야 현재의 봉완을 관찰하고 엿보더니 잠시 후 골목길을 돌아 나타나 현재가 된다. 상상과 현실, 과거와 현재처럼 대치되는 것들이 갑자기 하나의 것으로 한 데 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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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집 주소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나오는 커피 방앗간처럼 호기심이 생겨서 외웠다. 잔다리로 60번지를 검색하니 시향 중식당이 나온다. 가 봐야지.
간혹 맥락에 따라선 '네가 뭘 좀 아는구나?"라는 말만큼 웃긴 말도 드물다. 그건 자신이 지식우위에 있는 줄 알았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굉장히 실례되는 얘기일 수 있다. 뭐 여기선 연장자에 보스에 직업군에서 한참 선배인데다가 청자가 본인을 존경하고 인정한다는 대화가 앞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다지 실례가 아닐지도 모른다만.

오전에 봉완의 수상한 기색을 확신한 아내는 집을 뒤져 그만 둔 옛 애인의 쪽지를 찾아 내고, 출판사로 찾아온다. 그리고 거기 있던 아름을 봉완의 애인으로 오해하여 불꽃 싸다구를 날린다. 나 같으면 정황 파악 하자마자 그만뒀을 텐데, 신기하게도 사장이랑 저녁 때 술을 먹어준다. 아니 왜 먹어주는 것인가! 어쨌든 봉완은 술을 마시면서 그만두겠다는 아름을 붙잡는다. 그러나 골목길을 돌아 나타나 과거와 현재를 한 데 뒤섞어 버린 옛 애인을 만나고 나서 잠시 후 그 만류를 번복한다. "아름이가 그만둬야 할 것 같아. 그게 좋을 것 같아. 그래야 할 것 같아" 라고 했던가 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웃긴 장면이다.

황당함과 분노로 가득 찬 채 아름은 출판사 책들을 잔뜩 챙겨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눈발이 날리고, 아름은 열린 택시 차창 사이로 눈이 반사해 내는 달빛을 맞는다. 달빛을 얼굴에 머금은 김민희가 너무 예뻐서 그 모습을 본 것만으로 이 영화 잘 봤다며 영화에 호감이 생길 것 같은 그런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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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봉완은 문학상을 받고 아름은 축하의 말이 하고 싶어 들렀다며 들른다. 봉완은 아름을 잘 기억하지 못 하고 아픈 가족사를 다시 건드린다. 재회한 애인도 이미 다시 정리된 후다.

사회에 속박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질타를 감수하고도 사랑을 찾아 떠났건만 오래 가지 못한 관계,

그냥 마음이 그랬던 거다. 그때 그냥 그랬던 것. '내가 사는 이 곳엔 너의 흔적이 너무 많아서' 유령같은 과거와 매일 조우하고 가슴에 피멍이 들면서도, 그 순간은 진심이었던 걸 어쩌겠는가.

그 후, 모든 일이 끝난 뒤에,
그 때 왜 그랬어, 라는 질문만큼 무의미한 건 없을 것이다.
왜 사세요? 라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 사냐는 질문에 똑 부러지는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많을까.

왜 사세요? 그러게. 왜 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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