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인생을 살아, 남의 인생 대신 살지 말고
인 디 에어(Up in the air/2009)
-조지 클루니
-J.K. 시몬스(카메오 출연)
비행기는 자본주의가 가장 집약된 교통수단이다. 비행기는 불편함을 판다. 이코노미석은 성인 남자가 몸을 채 뻗기에도, 옆 사람을 밀어내지 않고 화장실을 가기에도 좁은,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점잖게 앉아 있으려면 굉장히 인내심이 필요한 공간이다(영화 속 조지 클루니는 물론 이코노미석을 타지는 않는다). 숏 사이즈가 있지만 톨 사이즈부터 메뉴판에 기재하여 기본으로 파는 스타벅스처럼 비행기는 비즈니스석에 평균의 기준을 맞춘다. 그 하위부터는 불편을 감수한다. 식사는 편의점 인스턴트 음식만도 못 하고, 1평도 안 되는 공간에 쭈그리고 팔꿈치를 모아가며 식사를 해야 한다. 비행기를 타려면 타기 전에 소지품을 검사받아야 하고, 신발까지 벗어가며 비루한 약자의 모습으로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사실 영화 내용이랑 별 상관없는 얘긴데, 이렇게 일반적으론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일을 1년에 300일 이상 감수하는(심지어 즐기는) 싱글 맨이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조지 클루니. 곧 네스프레소를 내려먹을 것만 같은 이 섹시 중년. 이 영화는, 다른 게 별론데 조지 클루니가 다 했다 이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냥 조지 클루니와 배역이 착 어우러지며 조지 클루니가 다 한 영화다. 다른 주연이었으면 절대 이렇게, 세련되게 유머러스하면서도 씁쓸한 느낌을 주는 영화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로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겐 마음을 닫고, 대신 일에만 매진하여 성공한 커리어를 쌓았지만 1년 중 300일 이상을 출장을 떠나며 지내는 라이언 빙햄(조지 클루니). 라이언은 해고 통보 전문가다. 회사 대신 고용자에게 해고를 통보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돈다. 라이언에게는 목표가 있는데, 항공 마일리지 천만을 달성하는 것이다. 천만 마일리지를 쌓으면 세계 7번째 달성자가 된다.
우여곡절 끝에 마음 맞는 후배도 만나고, 처음으로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다고 느끼며 생의 가치관 전체를 흔든 여자 알렉스도 만났지만 -
후배는 냉혹한 회사를 떠났고,
사랑하게 된 여자 알렉스는 유부녀였다.
조지 클루니는 늙어도 섹시해!라는 세뇌에 너무 길들여져있었던 것 같다. 멋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대체 몇 살인데 아직도 저렇게 멋있지? 조지 클루니라면 할아버지라도 땡큐지 하고 검색해보니, 어? 고작 1960년에 태어나신 분...... 아니 그럼 되려 노안인 건 아닌가......? 뭐 노안이든 동안이든 멋있으니 패스.
후배가 떠난 소식은 상사를 통해 들었고, 사랑하게 된 알렉스가 유부녀이며 그녀의 마음이 자신과 같지 않다는 것은 전화로 들었다. 한참 들떠서 그녀에게 고백하다가 씁쓸하게 전화를 끊는 조지 클루니의 그렁그렁 한 멍멍이 눈과 슬픈 표정은 화룡점정.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알렉스 쪽은 그때 즐거웠어, 진심이야, 너는 내 인생의 즐거운 이벤트야, 또 만나고 싶으면 연락해,라는 뉘앙스였던 거 같다.
그리고 라이언은 그토록 원하던 항공 마일리지 천만 달성을 세계 일곱 번 째로 해낸다. 그의 옆에 기장이 와서 앉으며 축하와 카드를 건네지만, 원하던 순간이 오자 왜 그렇게 이걸 원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라이언 빙햄의 직업은 해고 통보 전문가, 짬이 날 때 강의를 한다. 그런데 그의 목적은 그의 직업에 담긴 가치관이나 핵심과는 조금 빗겨 간, 항공 마일리지 누적 달성이다.
자본주의의 집약체 같은 이 비행기는 어딘가로 떠나는 데 필요한 교통수단이다. 말 그대로 수단. 수단이 목적인 삶을 살아오다가 목적을 달성하고 나니 그다음은 없었다.
영화 초반 라이언은 사람들이 비행기를 싫어하는 이유가 나쁜 공기와 싸구려로 서빙되는 식사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라이언이 이 환경을 즐겼던 것은 극단적으로 필요한 것만 남기고 생략해버린 효율의 정수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건 마치 사람에게 상처받은 라이언이 인생에서 사람을 배제해 버린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정성 들여 씻고 다듬은 재료, 육수를 오래 끓여 우려낸 맛 같은 것과는 육지에서 올라간 비행기 높이만큼이나 거리가 먼, 식사라는 단어로 부를 수 있도록 구색만 갖춘 형태의 음식물 모음. 옆 사람들의 체취가 느껴지지 않도록 시원하게 순환되는 인조 공기.
다시 한 번 비행기에 쓸쓸하게 오르는 라이언 빙햄. 삶은 또 그렇게 계속 지속된다. 본인이 느끼든 안 느끼든, 누구와 있든 혼자 있든, 주변의 많은 사람과 늘 즐겁고 다정하게 어울리든 그 반대이든 인간은 근원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외로움은 이상한 일이나 특별한 감정이 아니라 일생을 끌어안고 가야 할 일상의 감정이다. 외로운 걸 까먹고 있다가 떠올렸다 하는 일이 반복되는 게 사는 거다.
전에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네 인생을 살아. 남의 인생 대신 살지 말고. 나는 그냥 네가 뭘 하든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답게 살고 있지 않다는 것조차 어느새 잊어버리고, 현재의 삶에 너무 적응해버린 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언젠가 회사로 강의를 오셨던 한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괴로워한다는 건, 네 머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이 말씀에 아직도 동의한다.
원하는 것들을 점점 잊고, 남보기엔 번듯한 삶을 살며 속세에서 좋다는 것들을 하나둘씩 손에 넣다가,
어느 날 좋다는 것들을 전부 다 가지고 나서 뒤돌아보면, 본래의 나는 간데없고 남의 인생을 살았다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뭘 좋아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채로.
자기 삶의 의미가 뭔지, 뭐가 되고 싶었는지, 이루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평생 찾아보다가 아 모르겠다. 다 지나갔네. 하는 게 사는 거다.
업 인디 에어(Up in the air), "아직 미정"이라는 뜻이다. 삶의 중장기 목표들을 다 정해서 다 이루고 안정된 채로 끝까지 가는 일은 많지 않다. 문을 열고나면 또 관문 또 관문, 피곤하리만치 새 고민과 싸우고 차근차근 올라가야 하는데 그마저도 맞게 가는 길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맞았다 하더라도 시점이 바뀌면 또 달라진다. 그럼 그냥 받아들이고 덤덤하게 사는 거다. 다시 덤덤하게 비행기에 오르는 라이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