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 한 번 끝내주네!
어 퍼펙트 데이(A perfect day)
베네치오 델 토로 / 팀 로빈스 / 올가 쿠릴렌코 / 멜라니 티에리
페르난도 레온 드 아라노아
전쟁은 전쟁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편을 가른 군인들의 크고 작은 전투들 후, 그것들에 수반돼 영향을 받는 모든 생활과 전후 처리과정마저 하나하나 지난한 전쟁이다.
당장 어딘가에서 총알이 날아오거나 매설된 지뢰를 밟을 위험 속에 사는 하루도 전쟁이지만,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인간다움을 존중하지 않는 것, 생존의 위기에 놓인 다른 사람 앞에서의 무덤덤함도 차가운 전쟁의 한 면이다.
사람도, 바다도, 모든 것이 아름답기만 한 발칸반도는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렸다. 여러 인종과 종교가 얽혀 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스니아 내전 후, 전쟁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발칸반도에는 온갖 이해관계와 목적을 가진 집단들이 들어와 전쟁 후의 혼돈을 정리하고 있었다. 국제 긴급구호 비영리 단체인 '국경없는 도움'의 활동가들 역시 리더인 맘브루(베네치오 델 토로)를 중심으로 이곳에서 긴급구호를 펼치고 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는 비영리단체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 영화는 그동안 본 영화 중 NGO 활동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가장 실제와 비슷하게 그린 것 같다. 꼭 현장 활동가가 아니더라도 아프리카나 내전지역, 오지에 잠시라도 방문 혹은 체류하며 일한 적 있다면 이 영화가 굉장히 과거의 기억을 소환할 것 같다.
전쟁 중이 아니라면 별 것도 아닐 일이 큰 사건이 되고, 다양한 목적과 이해관계가 얽힌 집단들이 모여들어 끝없이 비효율적으로 조정 과정을 거치느라 중요한 본질이 흐려지고, 보통 때 같으면 금방 수습 가능한 나의 작은 실수나 평소의 단점이 극대화 되고 마는 현장.
조금이라도 쎄하거나 한 부분을 '에이, 괜찮겠지'하고 간과하면 어김없이 재앙이 돼서 돌아오곤 한다. 그렇게 몇 번을 당하다 보면, 볼펜 하나, 만날 사람을 위해 준비하는 매우 사소한 준비물들까지에도 매우 집착하게 된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상황을 푸는 결정적 열쇠가 되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현장을 망치는 트리거가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도 밧줄은 그냥 그깟 밧줄 하나가 아니다.
작은 마을의 유일한 식수원인 우물에 누군가 고의로 시체를 던져넣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서로간의 미움은 최소 한 세대의 삶이 끝나기 전까지는 오랫동안 종식되지 않는다. 어떻겠는가, 누군가가 나의 부모, 가족,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다면. 미움은 한 집단, 종족 전체로 전염된다.
24시간 내에 이 시체를 건져내지 않으면 마을은 식수원을 잃는다. 마을 주민들은 돈을 주고 물을 사지 않으면 기본적인 생존조차 불가하게 될 것이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반목이 휩쓸고 간 곳,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 사라져 버린 긴박한 곳에서는 당연한 논리와 인과관계가 당연하지 않은 것이 돼 버린다. 그깟 밧줄 하나를 구하기 위해 지뢰가 매설된 길을 몇십 킬로미터 자동차로 달리며 복불복 게임을 해야 한다. 마을 주민의 생존 외에 다른 목적이 없는데도 도로 통제로 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하게 되기도 하고, 그깟 시체를 우물에서 건지는 것이 불법행위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당연한 존엄과 살아오며 쌓아온 상식이 모두 당연하지 않아진다.
거듭되는 악재와 우울한 상황을 영화 속 주인공들은 시종일관 유머와 농담으로 견뎌낸다. 견뎌내는 느낌도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회사에 가듯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한두마디씩 투덜대고 비아냥댄다. 반어법과 비유로 상황을 조소하며 감정의 거리를 유지하고, 전설적인 과거의 사건을 논하며 낄낄대고, 일반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들처럼 예쁜 여자를 보면 좋아하고 연애도 한다. 이건 정말 실제 현장의 활동가들 모습과 닮아있다. 가끔 아프리카에서는 실제로 "와. 그나마 이것마저 00했으면 큰일날 뻔했어" 라는 말을 하며 자조적으로 깔깔대는 순간 그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슬프고 쎄한 느낌은 틀린 적이 없는 것이다.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뭣 같은 상황이 자주 반복되다 보면, 처음에는 황당해하다가 카오스를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일정이나 일이 계획대로 되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비난 받을까봐 예시로 적기는 힘들지만 상황에 대해 매우 직설적으로 묘사하는 거친 농담도 흔히 하게 된다. 말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직면하면서 오히려 극복하는 느낌인건가. 동료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쪼그리고 앉아 소변을 봐야 하는 상황도 생기지만 모두가 덤덤하다.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다른 곳에서 당연하던 인간의 존엄이나 생명존중 같은 것들이 더이상 당연하지 않을 때.
베네치오 델 토로. 시카리오 때도 살찌고 늙은 모습에 놀랐지만, 그때보다도 더 살찌고 더 늙었어도 정말 너므 너므 섹시하잖아요.
영화는 쿨하다. 안팎으로 쿨하다. 최악의 상황을 거듭 겪으며 농담을 하고,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주인공들의 매력처럼 영화 자체도 덤덤하다. 멋있는 척 하지 않지만 멋있다. 정상인 찾기가 초능력자 찾는 것만큼 힘든 요즘 세상에 모든 캐릭터는 각각의 개성이 뚜렷하지만 정상적이고, 하나 하나 사랑스럽고, 하나 하나 이해되고 몰입된다.
쓸데없이 자극적인 신도 감상적인 신도 없다. 뻔한 갈등도 없고 그저그저 담담하고 현실적으로 흘러가지만 재미와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팀 로빈스. 쇼생크 탈출의 그 팀 로빈스다. 나 안면인식 초능력잔데 몰라봤다......!
B와 맘브루, 물론 이건 영화이고 영화 대본은 멋있는 언어의 마술사들이 쓰니까, 유머도 외모도 일반 사람들보다 멋있지만, 현실과 비슷하게 그려져서 좋았다. 질질 짜거나 감성적이지 않으면서 일상을 살고 일을 해서 좋았다. 물론 업무에 임하는 태도가 실제보다 매우 유난히 훌륭하다. 내전지역이나 오지에서 선교를 한다거나, 사명감을 내비치며 감성적으로 군다거나,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친근하게 굴면서 생활에 깊이 개입하거나 하지 않는다. 해야 할 도리만 직업윤리와 프로토콜에 맞게 하는 것.
리더 맘브루는 신입에게 거칠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매우 이성적이고, 그럼에도 따뜻하다. 팀원들을 안전하게 하는 결론을 내고, 뺑이치지 않는 길을 늘 택한다.
NGO직원은 교회 오빠나 성녀가 아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은 아닐 수 있겠지만 나는 이게 그냥 하나의 특이한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비유가 적절하지 않을 수 있지만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이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대신 국선 변호사로 일할 것을 선택한 것과 비슷하게, 자신의 윤리나 가치관에 맞게 선택한 직업.
최악의 인프라 속에서 이오공감 노래의 한 대목처럼, 왜인지 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평소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카오스 속에서, 농담으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조소하고, 감정의 거리를 두고 위안하면서, 몇달과 몇년이 흐르고 나면 혼돈에 덤덤해진다.
[결말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서사는 정말 군더더기가 없다. 결말은 발군이다.
유엔이 그토록 개고생해서 구해온 밧줄을 석연찮은 이유로 허무하게 끊어버리고,
돌아서 가는 길에는 난민캠프 변소가 넘쳐서 손봐야 한다는 무전이 온다.
비만 안 오면 괜찮아. 하는 순간 내리는 비.
진부한 전개일 수도 있지만 이 특수한 상황과 말 없이도 모든 걸 말하는 인물들의 표정 때문에 블랙코미디가 돼 버린다.
사실 씁쓸하게 시체를 건지지 못한 채 돌아와 다시 하던대로 다른 일에 몰두한다는 결말도 훌륭할 것 같았는데,
시작 장면부터 끝 장면까지 영화를 관통하는 '밧줄'의 의미.
허무하게 끊어져 끝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손을 모아 밧줄을 붙잡을 때
때마침 쏟아지는 비처럼 느껴지는 시원함, 과 따뜻한 뭉클함.
마치 아무는 살이, 박힌 가시를 밀어올리듯,
스스로 치유되는 상처처럼.
결말을 끝까지 보고나면 마지막 퍼즐처럼 비로소 완성되는 영화의 제목.
"오늘 일진 한번 끝내주네!"
끝까지 안팎으로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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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이 끝내준다. 광활한 발칸반도 대자연 속 마릴린 맨슨 목소리 따위는 정말. 그리고 스태프롤 롤링될 때의 음악이 좋다. 루 리드의 There is no time
이 커플에 대해서도. 진행 중인 로맨스를 이 서사 안에 넣으면 정말 짜증날 것 같은데 지나간 사랑으로 가십거리 안주처럼 들어가서 꽤 흥미진진하게 관전하게 된다. 한때 뜨거웠지만 미련이 1도 없는 남자와 아직도 질척이는 여자. 현재는 각자의 연인이 있지만 아직도 미련이 잔뜩 남고 자존심이 상한 여자. 샐먼과 베이지 사이에서 씁쓸하게 그래... 과거는 과거지. 잠깐의 로맨스지. 하며 현실적으로 그려져서 좋았다. 보스니아 난민들을 위해 제발 저 여자랑 자, 그럼 저 여자가 보고서 좋게 써줄거고 우린 여기서 더 활동할 수 있어, 하는 부분에서 그 현실감에 정말 빵 터져서 폭소함.
올해 본 영화 중 세 손가락 안에 들게 좋았다.
컨택트, 덩케르크, 어 퍼펙트 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