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던진 비극의 굴레 안에서 인간은 이토록 무력하다
킬링 디어
<더 랍스터>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신작. 사전 지식 하나 없이, 다른 영화 보고 나오다가 본 포스터에 확 끌렸다. <더 랍스터>와 분위기는 비슷하다. 개인적으로 고뇌의 굴레에 갇힌 인간이 어떤 극단적 선택을 하는지 잔인하게 지켜본다는 점에서 드뇌 빌뇌브의 2013년작 <프리즈너스>도 떠오르게 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화목한 가정과 훌륭한 커리어, 완벽한 삶을 사는 듯 보이는 흉부외과의사 스티븐(콜린 패럴). 묘하게 갑질을 행세하는 애송이 청소년 마틴(배리 케오간)과 만남을 지속한다. 후반부와 대조되는 완벽한 삶, 시련이 없는 평상시의 이성을 강조하기 위해 가족은 비극이 일어나기 전에는 감정이 없는 로봇처럼 그려진다. 강박적일 정도로 완벽을 추구하는 삶을 보여준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스티븐과 마틴의 관계가 무엇인지 중반까지 알려주지 않는데, 같이 본 사람이 이 둘의 동성애 영화인 줄 알았다고 한다. 스티븐(콜린 패럴)이랑 이 청소년이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와이프인 애나(니콜 키드먼)가 눈치채게 되고, 그래서 벌어지는 치정 스릴러인 줄 알았다고. 아니 스티븐 킹 소설 좀 보신 분이 무슨 그런 똥 추리를.
완벽하던 삶에 균열이 생긴 것은 마틴이 점점 삶에 깊숙하게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과도한 요구를 지속하고 원치 않게 불쑥 불쑥 스티븐의 삶에 끼어들기 시작한 마틴. 급기야 가족들이 마틴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지만 속수무책이다.
영화는 결말까지 마틴이 가족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최면을 건 것이라고 생각했다. 답이 정확하게 나오지는 않으며, 사실 그게 중요하진 않다. 영화의 포인트는 1. 가족을 잃은 소년이, 실수(의료사고.라고 적고 나쁜 의사.라고 읽는다)로 가족을 죽게 한 가해자에게 똑같이 가족을 잃게 만드는 것 2. 그 과정에서 나락에 몰리기 시작하는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인간은 자신을 위협하는 위기 앞에서 어떻게 이기적이 되는지, 어떻게 발버둥 치면서 벗어나려 하는지. 이다.
영화는 서구권 사람들에게는 친숙하다는, 그리스 신화 속 사슴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트로이 전쟁 중 연합군 사령관 아가멤논은 실수로 전령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흰 사슴을 쏘아 죽여 저주를 받게 된다. 저주는 아가멤논이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쳐야만 풀리게 되어 있었다. 마틴은 가족 중 하나가 똑같이 죽어야만 이 복수가 끝나며, 피할 곳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프리즈너스>에서도 이 익숙한 사슴 비유로 영화 도입부에서 아들과 사냥을 나가 사슴을 쏘아 죽인 뒤 성경 구절을 읊조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틴을 좋아하던 딸 킴은 마틴에게 환심을 사려고 가장 대놓고 애쓰고, 밥은 자신보다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던지는 킴의 독설에 충격을 받고 아빠 마음에 들기 위해 머리를 자른다. 스티븐은 자신을 제외한 세 가족 중에 누구를 희생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고, 충격적이게도 애나는 "자식은 또 낳으면 돼"라고 하지만 결국 희생되는 한 명에서 제외되기 위한 속내를 가지고 육탄공세를 펼친다.(아이들 이름이 킴과 밥이다. 킴밥. 김밥......)
저주를 피해 가기 위한 이들의 발버둥은 제각각에게는 절실하지만 지켜보는 이에게는 기괴한 블랙 코미디다. 이 이야기가 그래서 어떻게 흘러갈지, 이 사람들이 어떻게 파국을 맞을지 지켜보는 것이 이 영화의 포인트이다. 이 과정이 굉장히 불쾌하고 고어해서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하고, 신에 비유될 수 있는 마틴이 인간들에게 부여한 단죄가 너무 단호하고 자비가 없어 절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과정의 서스펜스가 너무 쫄깃해서 눈을 가리고 싶지만 눈을 뗄 수가 없다.
큰 시련 안에서 인간은 자잘한 일상의 굴욕을 끝없이 맛봐야 한다. 문자적 의미를 초월하여 실체를 바로 체감하기 어려운 큰 시련 자체보다, 어쩌면 늘 돌아가던 일상의 작은 것들이 제 기능을 하지 않는 곤란함을 마주할 때 인간은 절망한다.
그리고 연속해서 일어나는 이 보풀에서 미래에 자신에게 닥쳐 올 비극을 본능적(죽음을 감지하는 본능은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본능이다)으로 감지하고 크게 허우적대는 모습은 언제나 멀리서 관조하는 사람이 볼 때에는 코미디 같은 법인가 보다. 절박하면 절박할수록 더.
결국 스티븐은 가족 몰살을 막기 위해 러시안룰렛(!)을 선택한다. 가족을 나란히 앉혀놓고 눈을 가린 채 빙빙 돌아 총을 쏘면, 공평한 확률에 따라 랜덤하게 총에 맞은 사람이 죽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일상과 동떨어져 판타지처럼 해괴하기 때문에 딱히 누군가에게 몰입하기 어려운 이 영화 속에서 그나마 가장 사람들이 죽기를 원하지 않았을 인물의 최후로 끝을 맺는다.
심장 전문의인 스티븐은 수많은 타인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지만 가장 사랑하는 가족 구성원의 심장을 총으로 쏘아 멈추게 한다. 스티븐이 쏜 총에 맞은 가족의 가슴에서 선혈이 흘러내린다.
아가멤논이 그랬듯 가장 순수한 존재의 희생으로 씻을 수 있던 나머지 사람들의 죄. 신이 던진 비극의 굴레 안에서 인간은 이토록 무력하다. 스티븐 킹의 유명한 저서 제목처럼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 영화 속에서 스티븐이 마틴의 엄마와 함께 감상하는 영화는 빌 머레이, 앤디 맥도웰 주연의 <사랑의 블랙홀>(1993)이다.
* 그리고 그 마틴의 엄마는 저 유명한 아메리캇 스윗하트 <클루리스>(1995)의 주연 알리시아 실버스톤이다. 아직도 예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