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정말로 괴롭히는 것은 외부 요소가 아니라 내 내면의 불안이다
블랙스완이 벌써 8년 전 영화구나. 넷플릭스에 블랙스완이 계속 추천처럼 떠서 재관람하게 되었다.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출연: 나탈리 포트만, 뱅상 카셀, 밀라 쿠니스, 위노나 라이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발레 영화는 아니고 심리 드라마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극 중에서 80%의 발레 동작을 스스로 소화했다는 나탈리 포트만이 춤으로 전율을 전해주지도, 발레리나와 어울리는 신체이지도 않는다. 아무리 감량하고 근육을 붙여도 프로포션이 발레리나들처럼 완벽하진 않고, 타고난 골격선이_어깨선과 허리 등이_너무 일자로 소녀스러우며 팔과 다리가 짧다. 팔이 짧아서 우아하지 않아 그런지 폴드브라가 부드럽지 않고 뻣뻣하다. 유럽 발레단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발레리나의 몸일 것이고,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에는 비슷한 신체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 속 실력으로는 ABT에 입단할 수 없을 것이다. 발레에 주목할 것은 아니고, 영화는 자기 자신과 끝없이 싸움하는 한 발레리나의 심리에 주목한 훌륭한 심리드라마이다.
나탈리 포트만은 그렇게 빼어나 보이지 않는 발레 동작들과 발레리나같지 않은 신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애처롭게 달빛 아래 서 있는 모습, 훅 다가오는 왕자에게 놀라 달아나는 백조의 모습과 표정은 정말 상처 입기 쉬운 백조처럼 아름다웠다. 유리처럼 깨지기 쉽고 순진한 모습이던 그녀는 극 후반으로 가면서 내면의 다크 다크 한 요소를 꺼내 터뜨리면서 조금씩 변한다.
나탈리 포트만의 이미지와 참 잘 어울리는 배역. 극 초반의 니나는 청순하고 깨끗한 마스크, 성실하고 순수한 모습이다. 초중반까지는 유리처럼 맑고 상처받기 쉬운 모습, 중후반부터는 광기 어린 욕망을 보여준다. 배우 자체가 흑조처럼 오묘하게 유혹적이거나 섹시한 스타일은 아니어서 후반 흑조 신으로 가도 유혹적인 모습보다는 다크 한 광기를 보여주는 편이다.
늘 자신을 놓지 못하는 단정한 모습에서 점점 내면에 억눌려있던 무의식 속 욕망을 보여주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내용. 톱에 오르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완벽하고 싶은 욕망. 그렇게 되기 위해 누군가를 질투하고, 피해 망상에 사로잡히고, 환각을 보고, 자해를 하는 모습.
이 영화는 좀 무섭다.
솔리스트이던 니나는 백조의 호수 주연으로 캐스팅된 뒤 스트레스로 인해 망상에 빠지며 스스로를 괴롭힌다. 거울 속의 니나가 실제 니나와 다른 모습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빈 연습실에 무언가가 나타나기도 하고, 니나를 경쟁상대로 생각하는 누군가가 니나를 주인공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 중요한 공연 리허설 날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피가 날 때까지 손톱으로 피부를 긁고, 흑조의 검은 날개가 돋아나는 망상에 빠지기도 한다.
피부에서 깃털이 돋는 니나의 망상 신은 본격 환 공포증을 유발하고, 다리가 꺾이거나 살을 뜯어내거나 깨진 거울로 복부를 찌르는 등의 상상 및 자해 신들은 매우 그로테스크하다.
전직 군무 댄서 출신이던 엄마(미혼모로 추정)의 과보호 아래서 생활하는 니나는
단장으로 인해 온갖 대상에 복잡 미묘한 감정을 품는다.
아버지 없이 자라고 과보호로 인해 연애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니나에게
억누르고 개발해오지 않았던 무의식 속 욕망을 끄집어내게끔 하는 단장. 단장에게 집착하는 마음에는 댄서로서 일류로 인정받고 수석 무용수인 베스의 자리를 대체하고 싶은 감정과 이성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혼재되어 있으며,
신입 동료인 릴리를 향한 단장의 칭찬에서는 여자로서의 질투와 백조 캐스팅을 빼앗길 것 같은 불안감이 혼재된 감정을 느끼고 피해 망상에 빠져 계속해서 환각을 보기 시작한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의 내면.
외부 요소는 그저 내 내면의 불안과 욕망을 움직이는 배경 정도.
단장의 성추행과 부적절한 단원 격려법, 동료의 여우짓, 새 캐스팅, 오래되었지만 아직 솔리스트인 무용단 내에서의 위치, 새로운 단원 입단, 엄마의 집착과 기행
모든 것이 외부 요소이지만, 그 요소들에 의해 불안을 품고 스스로를 몰아가는 것은 자신의 내면이다. 나를 정말로 괴롭히는 것은 외부 요소가 아니라 내 내면의 불안.
발레리나들은 완벽한 신체 때문인지
많이 입고 빨아 낡은 연습복을 대충 겹겹이 껴입어도
간지를 자랑하는데,
이 영화에서 나탈리 포트만이 입는 발레 연습복들도
패완얼 간지가 난다.
무심하게 걸친 후디와 워머 부츠,
연습 때 입는 청순한 톤의 슈러그 등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올백으로 묶은 머리에 촌스러운 듯한 귀걸이를 하고
지하철로 발레단에 출퇴근하는 뉴욕 발레리나의 모습이 매력적이다.
발레를 주제로 한 영화가 아니라 발레를 배경으로 한 영화지만
중간중간 발레단 이야기를 많이 엿볼 수 있기는 하다.
릴리와 니나가 밤에 한 잔 하러 나갔을 때 술집에서 만난 사람들이
"발레는 지루하지 않아요?"
라고 묻기도 하고,
점점 인기가 떨어지는 클래식 발레에 대한 고민과
나이가 들어 커리어가 빨리 단절되는 수석 무용수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무대 위에서는 다 같이 우아하지만
암투를 하거나 양아치처럼 수석 무용수 험담을 하는 동료들과
동료 무용수의 실수에 관대하지 못한 파트너도 나오고.
무용수 가르친답시고 성희롱을 일삼거나 단원들과 부적절한 경계를 넘나드는 단장도 그렇고.
한때 모니카 벨루치의 남편이기도 했던 뱅상 카셀.
지상 최고의 미인을 가진 남자였어도
꿀리지 않는다고들 했었는데,
2010년 당시 내 눈에는 뱅상 카셀이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에 등장하는
눈알 괴물이랑 너무 닮은 것이었다.
눈 사이가 좀 넓고 돌출된 안구 구조 때문인지.
저렇게 눈알 괴물의 몰골을 하고
자꾸 무용수를 성추행하는 단장의 모습을 보여서
몹시 꼴보기가 싫은 것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좀 먹고 나서 이 영화를 다시 보니,
뱅상 카셀이 왜 희대의 미녀를 소유할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극 중에서 성추행범인 것은 변함이 없지만
그냥 사람이 되게 매력적이고 멋있구나.
우정 출연에 가까운
위노나 라이더의 모습.
극중 위노나 라이더가 연기한 베스는
스타 수석 무용수로서 실력과 미모, 젊음을 겸비한 ABT의 간판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인기도, 실력도 쇠퇴해갈 뿐 아니라
단장과의 부적절한 관계와 톱의 자리를 붙잡고 싶은 본인의 불안한 심리
모든 것이 뒤엉켜 스스로를 나락에 빠뜨리는 중이었다.
도대체 왜 이 역할을 맡았을까 싶을 정도로
위노나 라이더 자신의 실제 이력이 겹쳐 보여서 안타까웠던
베스 역할.
"I was perfect."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혼신의 연기 끝에
환희에 취한 나탈리 포트만의 대사.
단장이 마침내 베스에게만 부르던 칭호(내 작은 공주님)로
니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대다수의 무용수들은 단장의 성희롱과 여성편력을 혐오하고 있으나, 니나는 단장에게 예쁨 받음으로써 실력을 입증해 보이고 싶어 한다),
스스로 찌른 복부에서 흐르는 피가
흰 의상을 적시고......
강렬한 흑조 분장과 의상.
흑조의 하이라이트 32회전 푸에테는 대역이랑 합성한 CG이려나.
나탈리 포트만은 어릴 때 발레를 배웠다고는 해도 턴 아웃이 너무 잘 되던데
하체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솔리스트인 사라 레인이
본인이 대부분 연기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1막에서 리프트 실수를 크게 한 니나는
광기 어린 흑조를 완벽하게 연기하여
동료들의 인정을 받고,
관객의 환호를 받는다.
32회전 푸에테는 실제로
백조의 호수의 하이라이트이다.
극 속에서는 긴가민가하던 지그프리트가
32회전 이후 흑조를 아내로 맞기로 마음을 결정하는데
그만큼 결정적인 유혹의 하이라이트이고,
연기하는 발레리나에게도 1인 2역의 상반된 모습을
가장 고난도의 테크닉과 함께 보여줘야 하는 부분.
영화 시작할 때 백조를 연기하는 니나. 나탈리 포트만의 평소 이미지와 배역이 정말 잘 어울렸다.
극중 니나와 상반되게
유쾌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의 밀라 쿠니스.
샌프란시스코 발레단에서 온 신입 설정으로,
니나의 폭풍 질투 및 망상의 대상이 된다.
니나의 망상을 걷어내고 보면,
극 중에서 굉장히 솔직하고 쿨하고 성격 좋은 인물인데.
다시 보면서 느낀 건, 이 잔인함과 다크함이 처음 영화관에서 관람할 때만큼 힘겹지는 않구나. 나 담이 많이 강해졌구나. 요즘은 이런 느낌의 영화가 꽤 많이 생겼구나.
이 정도 불편함이 옛날보다는 심장 덜 내려앉는구나. 하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