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토냐] 인정 안 받아도 돼요, 내가 인정하니까

토냐 하딩, 지루한 사람들에게 마음껏 욕설을 날려라

by 랄라




왓챠 플레이에 보고 싶던 <아이, 토냐>가 올라와서 보았다.
마고 로비 주연, 황석희 번역.

영화가 실제 범죄를 저지른 인물의 삶을 미화하고 범행 동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듯 묘사되었다고 하여 논란이 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이 영화는 실화의 재현이나 미화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미국 피겨계에서 일어난 전대미문의 실제 사건사고를 스토리로 삼고 있고 이 사건의 발생 경위를 추적하기 위해 토냐 하딩의 인생을 따라가지만, 스토리 자체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 전달에 그저 사용될 뿐이다.

라보나 골든과 그녀의 세 번째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토냐 하딩은 네 살 때부터 이미 두드러진 재능을 보였다. 미국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트리플 악셀 점프에 성공해 대중의 큰 관심을 받지만 폭력과 학대로 점철된 성장 배경의 직간접적 영향으로 결국 자신의 삶을 나락으로 밀어 넣는 선택을 하고 만다.








실화에 대해 잘 몰라서 그냥 영화 자체만 보고 생각한 것들을 적는다.

대중은 늘 죄책감 없이 마음 놓고 미워할 대상을 찾는다. 마음 놓고 미워해도 될 만큼 극악무도한 사람을. 이미 큰 사랑을 받으며 관심의 대상이었던 토냐 하딩은 그런 대중의 수요를 더없이 적절하게 충족하는 존재였다. 토냐는 자신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계급이나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 기득권이나 중심인물로 갑자기 성장하는 꼴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본능을 정통으로 거스르며 대중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80~90년대 버블경제 시기 대중의 피겨여왕님은, 유복한 가정에서 곱게 자란 여성스럽고 귀한 딸내미여야 했던 것이다.

점프를 모두 성공해도 연이어 기록되는 낮은 스코어에 불만을 품은 토냐는 주차장을 벗어나는 중인 한 심사위원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묻는다. 나는 내 점프를 모두 성공했는데 왜 이런 점수를 받아야 하느냐고. 돌아오는 대답은 "당신은 우리가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다"였다.






영화조차 마음 놓고 불우함을 유머로 씹어대도 질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대상을 제대로 고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토냐 하딩의 인생은 철저하게 불행하다.

토냐는 어머니의 학대와 아버지의 방치 속에 성장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는 나이부터 맞고 자랐기 때문에 남편이 자신을 때릴 때에도 그 폭력이 결코 용인될 수 없는 행동이라고 판단하지 못한다. 1등만 강요하는 엄마와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를 밟고 올라가도록 교육받고, 욕설과 폭력, 방치에 익숙하고, 어린 시절부터 총을 손에 잡아도 이상하지 않던 토냐 하딩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코믹하고 건조하게 그린다. 초중반까지는 와 쩌는데? 싶던 이 블랙코미디는 중후반으로 가면 부연이 많아지면서 조금 뻔하고 지루해지지만, 어쨌든 끝까지 건조함을 유지함으로써 세련된 영화로 남는다.

바비인형같이 부풀린 금발머리로 오븐에 빵을 구워내는 자상한 엄마와 잘 재단된 정장을 입은 능력 있는 아빠와 우아한 털 코트를 입은 숙녀 같은 딸의 이미지. 유복한 가정의 잘 자란 영양이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승리하여 국격을 높여주기를 원하던 90년대 미국 사회와 피겨계. 토냐는 자신이 손바느질로 꿰매 만든 의상을 입고, 토끼털 코트를 입으라고 강요받자 스스로 총을 들고 토끼를 잡으러 나간다.




실제 토냐 하딩은 나쁜 사람이지만, 영화 속 토냐 하딩은 불행 속에서도 경쾌한 인물이다. 하층민 계급에서 자란 토냐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주류 사회로 들어가기 위해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사회와 피겨계가 원하는 이미지로 자신을 맞추어 재단하지 않고 그 자신의 모습 자체로 성공해낸다.

마고 로비는 전형적인 여성성 없는 여성을 누구보다 사랑스럽게 소화해냈다. 있는 대로 입을 크게 벌리고 웃고 누구보다 큰 소리로 욕하고 뜨겁게 화내고, 다리를 벌리고 앉아도 그저 정 가고 예쁘다.
쏙 빠진 계란형의 가냘픈 얼굴형이 아니어도, 여리여리한 허리가 없어도 마고 로비는 매력적이다. 우아하고 부러질 듯 하늘하늘한 피겨여왕님들의 춤보다 훨씬 매력적인, 마고 로비 자신처럼 재미있고 정열적이고 파워풀한 춤에서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감히 넘보기 어려워 보이는 포스의 금발 쭉빵 미녀라고만 생각했던 마고 로비의 연기는 굉장했다. 이 영화는 마고 로비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퀄리티로 완성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건조함을 응축해오다가 한 번에 서러움을 터뜨리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는 분장실 신.
세계선수권대회 출전을 앞두고, 분장실에서 분장하다가 눌러온 울음을 터뜨린 토냐가 이윽고 무대 위에서의 웃음을 거울 앞에서 다시 지어 보이는 장면. 마고 로비 연기는 인상적이다.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의 실수, 긴장 끝에 신발 끈을 잘못 묶은 토냐는 심사위원에게 울면서 달려가 신발 끈을 다시 묶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스케이트 날이 얼음을 가르고 녹은 표면에서 스며나온 물이 스케이트 날과 닿으면서 나는 소리가 잘할 때나 못할 때나 무대의 생생함을 잘 표현해주는데, 이 대회에서 점프에 실패한 토냐가 얼음판 바닥에 굴렀을 때 관중석의 정적 표현은 마치 내가 실제로 누군가의 큰 실수를 목격했을 때와 같은 느낌을 준다. '내가 뭘 본 거지? 저 사람은 괜찮은 건가?' 싶은 느낌. 정적만 흐르는데도 그 많은 사람들의 뜨악함이 느껴진다. 갑분싸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이다.



토냐는 신발 끈을 스스로 고쳐매고 스스로 만족한 연기를 펼쳤으나, 세계선수권 8위라는 저조한 성적에 머무른다.
"근데 인정 안 받아도 돼요. 내가 인정하니까."


토냐는 모두가 자신만의 진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실화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영화에서는, 한 사건에 대한 기억은 각자가 미리 가치판단하고 선택적으로 조합한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 당사자가 아닌 자들은 죄책감 없이 돌을 던져도 되는 대상에 돌팔매질을 함으로써 자신은 저 죄인보다 우위에 있고 나는 저런 사람이 아니라는 확고한 위안을 받는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만들어낸 개체 개체의 괴물.
제멋대로 동의한 적도 없는 한 개인에게서 자신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보고 멋대로 사랑한 뒤, 제멋대로 흠을 잡고 마음껏 미워하면서 희대의 악녀로 만드는 언론.
타고난 결핍 때문에 절실히 사랑받고 싶었고, 결국 사랑받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많은 미움을 받는 사람이 되어버린 인생.
토냐 하딩, 지루한 사람들에게 마음껏 욕설을 날리고, 저 위에 팔짱 낀 채 고상 떨며 앉아서 보기 흉한 줄도 모르고 걱정하는 척 남의 삶을 헐뜯는 사람들에게 신고 있던 스케이트를 벗어서 힘껏 던져라.
사랑받아봤자 기쁘지 않은 가치 없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대신 네가 네 자신을 가장 인정하고 사랑해주며 지금처럼 살아가라.

*어디까지나 영화 속 토냐 하딩에게만 하는 말이다.


데이미언 셰젤이 퍼스트맨에서 실존 인물의 사진 한 장, 에필로그 글 한 줄 넣지 않은 게 얼마나 쿨하고 멋진지 보헤미안 랩소디를 본 후에도,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느꼈다. 그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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