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스페리아

메타포에 매몰되지 않고 보면 아름다운 영화

by 랄라

서스페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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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구아다니노,

틸다 스윈튼, 다코타 존슨, 미아 고스

음악감독 톰 요크(라디오 헤드)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와, 이렇게까지? 영화가 끝나고 불이 들어온 뒤 든 생각이다. 아마 대부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함. 겁이 많고 비위가 약한 관객이라면 중간에 나가고 싶었거나 트라우마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고어한 피 파티에는 비위가 강한 편이지만 후반부는 정말 강렬하게 잔혹해서, 이렇게까지 나가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나 되새기게끔 해주었다. 그래도 누군가 무섭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No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물론 서스페리아는 훌륭한 공포영화여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불편함을 고르고 골라 선사한다. 후반 30분의 배를 찢고 쏟아져 나온 내장과 피, 화려한 피의 향연 속 광기 어린 몸짓은 물론 꿈이 선사하는 말초적인 공포, 수지가 춤을 출 때마다 관절이 부러지고 뒤틀리는 장면까지. 다리 앞쪽을 힘차게 뚫고 나오는 정강이뼈나 잘린 목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피처럼, 사람들이 무의식 속에 품고 있는 신체 절단에 대한 공포도 거침없이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비위가 특별히 약한 편이 아니더라도, 비위가 특별히 강한 편이 아니라면 불편할 각오를 하고 봐야 한다. 게다가 영화가 어렵기 때문에,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나'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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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오 아르젠트의 원작은 보지 못했고, 아무 사전 지식 없이 관람한 후기.

영화에는 곳곳에 메타포가 가득한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여 걱정했으나 나 같은 세계사 고자도 영화의 맥을 못 짚을 정도는 아니었다. 시청각적(라디오 헤드 톰 요크의 음악감독 데뷔작이다)으로는 충분히 아름다우므로, 비유를 다 알지 못하고 본다 해도 즐길 거리는 많다. 배역을 위해 무용을 오랫동안 배웠다는 배우들의 몸동작도 몸도 참 아름답다.


베를린 무용 아카데미에서 무용계의 전설 마담 블랑(틸다 스윈튼)에게 배움을 얻기 위해 미국에서 온 수지(다코타 존슨)는 어쩐지 경계 가득하고 불친절해 보이는 지도교사들의 눈빛 속에서 오디션에 합격하고 공연을 얼마 남기지 않은 마담 블랑의 작품 Volk(폴크)의 주역 자리까지 따낸다.


6172_17582_1131.jpg 영화 <서스페리아> 스틸 이미지. 클로이 모레츠는 우정 출연 수준이니 클로이 모레츠 팬이라서 이 영화를 보러 가는 관객이라면 넣어둬 넣어둬.


무용단에서는 월급도 제공하지 않고(열정페이, 청년 노동력 착취) 대신 기숙사만을 제공하였는데, 무용단 기숙사에 투숙한 날 이후 무용단의 댄서들은 하나같이 변기와 머리카락, 가면을 쓴 누군가가 숨을 거두며 입을 벌리는 이미지 등을 보게 되는 악몽을 꾼 모양이다. 벽을 통해 수상한 소음이 계속 들려오기도 한다.


무용수들은 마녀의 제물로 바쳐지곤 하였는데, 영화 초반 정신과 의사인 클렘 페러(틸다 스윈튼)를 찾아왔던 페트리샤(클로이 모레츠), 무용단이 이상한 일을 하고 있다며 뛰쳐나가려다 거울의 방에 갇힌 올가는 제물이 되었지만 수지(다코타 존슨)는 남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마담 블랑의 눈에 띈다. 미국에서 베를린에 도착한 수지가 내린 역 이름은 '서스페리아'다. 실제로 독일에 그런 이름을 가진 역이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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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아름다운 무용수들의 이미지와 춤, 옛 유럽의 정취들로 눈을 현혹하는 한 편 무수한 메타포와 그로테스크한 그림들로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77년의 독일에서는 곳곳에 혼재하는 사회주의 세력을 막느라 나치의 잔존 세력이 완전하게 청산되지 않았으며, 서독의 극좌파 테러단체인 바더 마인호프의 활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바더 마인호프의 테러가 극에 달하던 이 시기를 '독일의 가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무용단의 지도교사들은 마녀이며, 청산되지 않은 구 세력을 상징한다. 새로운 한숨의 마녀 서스피리움으로 등장한 수지는 이들을 밀어내고 세대교체를 이룬다. 수지는 자신을 가르치는 블랑의 생각에 자주 반기를 든다. 심지어 '폴크'의 안무가인 블랑인데, 뛰어 오르는 도약이 더 돋보이려면 더 깊이 바닥을 기어야 한다는 등 안무에 대해서도 반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I am She."

범상치 않은 잠재력을 보이던 수지는 결국 한숨의 마녀가 되고 정권을 잡게 된다.

어둠의 마녀, 눈물의 마녀, 한숨의 마녀 중 가장 힘이 센 것은 한숨의 마녀다. 가장 힘이 센 한숨의 마녀 서스페리움이 되어 선혈이 낭자한 숙청 파티를 끝낸 뒤, 죽어가는 클렘 페러를 다시 찾아가 토닥이는 수지의 모습에서 교체된 세력이 구 세력의 횡포를 막고 밀어내기는 하였으나 포용하고 화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쿠키영상에서 손을 쓸어내려 구시대의 낙서(잔재)를 지우는 수지의 모습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마녀의식 도중 의식에 참여하는 무용수들은 '죽고 싶어요'라고 하고, 죽음으로써 핍박에서 벗어나 구원받고 깨끗한 새 숨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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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볼 요소도 있다. 영화의 주요 배역 중 남자 배우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유일하게 중요한 남성 캐릭터인 클렘 페러는 틸다 스윈튼이 1인 3역(블락 역, 클렘 페러 역, 마녀 역) 중 한 역할로 연기했으며, 그 캐릭터는 마녀 의식에서 마녀들에게 처참하게 짓밟힌다. '마담 블랑은 우파가 여자를 아이 낳는 자궁으로만 생각하던 시절부터 저항해왔다'라는 노골적인 대사도 등장하며, 감독도 인터뷰에서 여성에 대해 새롭게 이야기해보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어머니와 딸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감독은 영화 속에서 '전통적인 모성에 사람들이 불어넣은 환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감독은 딸과 어머니는 질투하고 경쟁하기도 하며, 모는 출산 후 산후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한다고 말한다. 수지와 어머니의 관계는 어딘지 불편하게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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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메타포를 이해하고 보면 좋기야 하겠지만 내 경우 독일 역사에 대해 해박하기는커녕 기본적인 것도 잘 모르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영화 자체의 만듦새에 집중해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굳이 이게 뭘까 너무 고민하지 않고 보면 재미있고 맥락도 이해된다. 비유가 중요한 영화라지만 메타포에 너무 매몰되면 영화를 즐기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나는 특히 무용학교의 공포 분위기와, 무용실에서 배우들이 추는 춤과 몸짓, 안무를 보는 것이 가장 즐거웠던 것 같다. 고전 발레는 아니고 현대무용에 가깝기는 한데, 어쨌든 다코타 존슨의 훌륭한 신체 조건과 아름다운 몸짓, 낯선 곳에서 눈치 보고 어려워하던 모습에서 점점 당당하게 변모해가는 과정을 춤으로 지켜보는 것은 즐거웠다. 미아 고스도 너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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