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월 Dec 08. 2023

두 번째 사랑과 함께 오색광채로 태어난 정조의 아들

왕가의 사랑이야기 - 창경궁 집복헌

조선시대에 가장 훌륭한 왕으로 꼽히는 임금에 이 두 사람을 올리는 데 아마 그 누구도 이이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이지요. 세종대왕이 조선 전기를 책임졌다면, 정조대왕은 조선 후기를 지탱한 임금입니다. 이번에는 정조대왕과 창경궁 이야기를 해볼까요?


정조대왕 이산에게는 네 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은 효의왕후 김씨입니다. 효의왕후는 마음씨가 아주 고운 왕비 여인이었어요. 

효심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극정성을 모셔 혜경궁 홍씨도 효의왕후에 대한 칭찬을 늘 하곤 했습니다. 시누이인 화완옹주가 오빠 정조를 싫어한 것처럼 올케 효의왕후도 아주 싫어하고 많이 괴롭혔음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이 할 바를 다하며 화완옹주에게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는데 자신이 기거하던 전각과 궁에서 쓰다 남은 재물이라도 사사로이 사가에 절대로 흘러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효의왕후는 주위와 궁궐 내부에서도 인심을 많이 얻었고 시아버지 영조도 며느리 효의왕후를 어여삐 여겼답니다. 

그런데 남편 이산과의 사이에 아이가 없어 효의왕후는 늘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여인의 최대 임무는 집안의 대를 잇는 자손, 특히 아들을 낳는 것인데 하물며 왕실이여 그 부담이 어땠겠습니까?

그래서 효의왕후는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상상임신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효의왕후가 임신한 줄 알고 아주 기뻐했던 정조, 산실청까지 설치하였는데 1년이 다 가도록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죠. 산실청은 철수되었고 효의왕후의 실망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첫째 후궁) 원빈 홍씨입니다. 원빈 홍씨는 홍국영의 누이입니다. 효의왕후에게서 아이가 없자 대비의 권유로 후궁을 들였는데 당시 제2인자였던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를 후궁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원빈 홍씨는 당시 제2인자의 동생으로  효의왕후는 원빈을 꺼려 하여  원빈 홍씨의 후궁 된 인사를 받는 것조차 회피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사이가 안 좋았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원빈 홍씨는 후궁이 된 지 일 년 만에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홍국영은 동생 원빈이 죽은 것에 길길이 화를 내며 효의왕후가 배후에 있다고 모함을 했어요. 당시의 실세였던 홍국영, 감히 중전인 효의왕후의 궁녀를 잡아다 문초를 하며 효의왕후의 배후설에 대하여 실토하라고 윽박질렀지요. 이때 세상없이 인자한 효의왕후는 처음으로 정치적 행동을 하며 화를 냈는데, 정조는 효의왕후의 억울함을 풀어주었고 홍국영을 귀양보내버렸습니다. 아무리 2인자 권력이라도 나설 때 안 나설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 부인(둘째 후궁)은 화빈 윤씨입니다. 원빈 홍씨가 일찍 죽자 자손을 위해 또 후궁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화빈 윤씨는 효의왕후와 넷째 후궁인 의빈 성씨를 향한 투기가 아주 심했습니다. 오죽하면 의빈 성씨가 아들을 낳았을 때 "의빈이 희한한 방중술로 주상을 유혹하여 아이를 낳았다'라는 헛소문을 퍼트리기도 했습니다. 워낙 의빈을 시기 질투하니 이후 만삭이었던 의빈이 갑자기 죽자 화빈이 독살했다는 설이 돌았는데 이를 조사하여 보니, 화빈이 의빈에게 잘못된 약도 건넸고 산실청도 차일피일 연기하는 등의 행실이 발각되어 후궁임에도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습니다. 이후에 화빈의 행적은 알 수가 없습니다. 


네 번째 부인은(셋째 후궁) 의빈 성씨입니다. MBC 드라마 <이산>과 같은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을 통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평소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던 정조가 유일하게 스스로 승은을 내린 궁녀이며 후궁으로 삼은 여인입니다. 아마 정조 임금이 최초로 정말로 사랑한 여인이 의빈일 것입니다. 일찍이 궁녀로 궁궐에 입궐한 의빈은 성품이 인자한 효의왕후와도 사이가 아주 좋았습니다. 그래서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 승은을 처음으로 내리고자 했을 때 의빈은 무릎을 꿇고 슬피 울며 "저하, 세손빈 마마가 아직 어리시고 태기가 없으시니 소녀에게 승은을 내리신다는 하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라며 감히 세손의 하명을 거역한 여인이었습니다. 

몇 년 뒤 정조가 임금이 된 후 정조는 의빈에게 다시 한번 승은을 내리고자 합니다. 이때는 원빈과 화빈이 후궁으로 입궁하고 있었을 때인데 정조는 원빈과 화빈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고 의빈만 찾았습니다. 이때도 의빈은 임금의 승은을 거부하였으나 정조 임금이 단단히 화가 나 하인을 꾸짖고 벌을 주니까 그제야 의빈이 마지못한 척 승은을 입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정조와 의빈은 정말 사랑했나 봅니다. 같이 사는 7년 동안 5번의 임신을 하였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 부인은(넷째 후궁)은 유빈 박씨입니다. 사랑하는 여인 의빈이 죽고 의빈이 낳은 세자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실에 후손이 없으면 큰일입니다. 이에 정조는 또다시 후궁을 간택하였는데 그가 바로 유빈 박씨입니다. 유빈 박씨도 다행히 참으로 참한 여인이었습니다. 평소 예절도 바르고 사치를 멀리했으며 성품 또한 온화하여 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수빈은 나중에 정조가 죽고 아들 순조가 임금이 되자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대비가 된 효의왕후를 극진히 끝까지 잘 모셨어요. 

의빈이 떠난 빈 자리 유빈은 정조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랑도 잡았습니다. 정조는 유빈에게 사랑을 주었는데, 그래선지 어쩐지 유빈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순조 임금이 되었습니다. 수빈 박씨가 아들 순조를 낳은 곳이 어디냐? 바로 창경궁 집복헌이었습니다. 유빈 박씨는 6월 18일에 순조를 낳았는데 그날 새벽 집복헌 주변에는  "금림(禁林)에는 붉은 광채가 있어 땅에 내리비쳤고 해가 한낮이 되자 무지개가 태묘(太廟)의 우물 속에서 일어나 오색광채를 이루었다"네요. 정조 임금님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리고 더 기뻤던 것은 이날이 정조 임금님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생일날이기도 했던 겁니다. 제일 사랑하는 여인인 어머니의 생일날 다음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의 아들을 낳다니! 감동의 도가니예요!!!


일 년 뒤 혜경궁 홍씨의 생일날 원자 순조의 돌 상도 집복헌에서 같이 차렸어요. 순조는 첫돌에서 예쁜 모자를 쓰고 자주색 비단 옷을 입고 돌 상을 받았어요. 무엇을 집었을까요? 첫 번째로 집은 물건은 실이었다네요. 순조가 45살까지 살았으니 장수한 걸까요? 그다음으로는 화살과 악기를 집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달리 공부보다는 예체능에 재주가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네요. 할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닮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사도세자도 집복헌에서 태어났으니 이것도 인연일지, 우연일지, 운명일지, 무엇일까요? 

 

아들에 대한 보고픔인지 유빈 박씨에 대한 그리움인지, 정조는 집복헌에서 아들이 태어난 이후 궁궐 편전보다 집복헌 옆 작은 전각인 영춘헌에 자주 머무르며 정사까지 처리하였습니다. 독서하기 아주 좋다며 책도 아주 많이 읽었죠. 정조가 늘 영춘헌에 기거하다 보니 여러 신하들이 건물이 많이 낡았다며 수리를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조 임금님은 '그만하면 되었다'라며 허락하지 않았어요. 정조 임금님은 영춘헌의 사계절을 즐기며 그곳에서 아들도 보고 부인도 보고 시도 짓고 그림도 그리며 지내시다가 종기가 덧쳐서 49세를 일기로 이곳 영춘헌에서 승하하시고 말았습니다. 

5년만 더 사시지. 그럼 조선의 역사가 많이 바뀌었을 텐데, 세도정치가 조금이라도 지연되었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에 역사에 '만약'이라는 부실없는 가정을 더해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복이 없던 문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